[살며 사랑하며-성혜영] 과잉시대의 말들
입력 2010-06-03 18:48
뒤늦게 일본어를 배우느라 고생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는 중이다. 그나마 아는 한자 덕을 좀 볼까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같은 한자라도 읽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것이 문제였고, 원래의 의미에서 비껴 있거나 뉘앙스가 다른 것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가령 어쭙잖은 한자 실력으로 넘겨짚었다가 실소를 금치 못했던 말은 이런 것들이다. ‘잇쇼켄메이’(一生懸命)는 평생 목숨을 거는 게 아니라 그냥 ‘열심히’의 뜻이고, ‘다이죠부’(大丈夫)는 그야말로 대장부가 아닌 ‘괜찮다’, ‘신켄쇼부’(眞劍勝負)는 진검의 결투가 아니라 진지하게 승부를 가린다는, 보다 평범한 의미로 쓰인다. 한편 ‘사시미’(刺身)는 한자로 쓰고 보면 섬뜩하기가 입맛이 달아날 정도다. 어원이나 전와 과정을 따져보면 그럴 만하겠지만, 대부분 의미에 비해 말이 과장되어 있다.
존경어와 겸양어도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은행이나 백화점에서는 복잡한 존경체에 혼이 빠져 정작 중요한 말을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상대를 높일 때와 나를 낮출 때를 헛갈려서 윗사람에게 낯 뜨거운 실수도 여러 번 했다. 일본어가 잘 늘지 않아 괜한 트집일까? 어쨌거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목청을 돋우던 참이었다.
그런데 ‘패륜녀’ ‘발길질녀’ 등의 뉴스를 듣자니 남 말할 처지가 아니다 싶다. 떴다 하면 ‘영웅’, 만났다 하면 ‘열애’, 헤어졌다 하면 ‘결별’ 정도의 호들갑은 차라리 애교였다. 된장녀, 개똥녀 등 상스러운 신조어가 귀에 거슬리더니, 품절녀, 루저녀, 배신남, 몰결남 등 이상한 말의 목록은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고 있다.
‘예의 없는 젊은 것들’을 꾸짖고 걱정하느라 그 꺼림칙한 말들은 또 자연스럽게 재생되었고, 그 사이 막말은 ‘막말녀’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진솔하고 은근한 말들이 우물쭈물하는 동안 화끈하고 적나라한 말들은 네 활개를 쳤다. 시인 황인숙의 표현을 빌리면, ‘솔직’이라는 옷을 입고 삿됨과 속됨과 추함과 비천함을 발산하는 노악(露惡)의 수준이다.
한때 수화기 저편으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 아세요?” 했다던가, “저는, 아닌데요!” 했다던가.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던 그 ‘립 서비스’도 자꾸 듣다보니 이제는 무심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지만.
이래저래 말이 부풀어 간다. 남용과 과용으로 말 속에서는 정의도 친절도 사랑도 포화상태다. 실제가 그렇지 못할 바에야 말은 넘치느니 모자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모자람 속에는 적어도 말의 본래의 의미가, 상징과 은유가 살아 있을 테니. 극단의 시대, 과잉의 시대에 표류하는 말들이 절규하는 듯하다. 나, 돌아가고 싶어! 라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말이 하나 있다. ‘스바라시이’. 멋지다, 훌륭하다는 뜻인데 한자로는 ‘素晴’이라고 쓴다. 바탕이 비가 갠 하늘처럼 맑다니, 정말 멋지지 않은가!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