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이 공격했다며 전쟁 나는거 아냐?”… 그리스- 한국 두 처녀의 ‘메신저 수다’
입력 2010-06-03 18:03
지난달 26일. 주섬주섬 퇴근 준비를 하는데 컴퓨터 화면 하단의 파란색 메신저 메뉴가 깜박였다. 말을 걸어온 대화명은 ‘EIRINI’. 3년 전인 2007년 영국 런던 브루넬대학 연수 때 같은 기숙사에서 지낸 이리니 디아만토포울로(33·여). 그리스 친구였다.
교육학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지금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국립유치원 교사다. 온갖 파티를 다 쫓아다니던, 춤출 때마다 천식 때문에 호흡이 가빠오지만 휴대용 흡입기로 숨을 고르곤 다시 몸을 흔들던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얼른 메신저 창을 열었다.
EIRINI님의 말: 혜숙, 별 일 없니? 한국 뉴스 보고 네 걱정했어.
Hye Sook Kwon님의 말: 아무 일 없는데, 무슨 뉴스?
EIRINI: 너희 나라 전쟁 날지도 모른다고. 북한이 공격해서 미군이랑 한국군이 군사훈련 한다던데.
Kwon: 아∼ 맞아. 근데 난 담담해. 북한하고 저러는 일이 자주 있어서 이번에도 별 일 있겠나 싶어. 예전보다는 좀 심각하지만.
EIRINI: 우리도 터키랑 늘 티격태격하는데, 비슷한 모양이네.
Kwon: 국경 문제 때문이라고 했던가?
EIRINI: 응. 몇 년 전에는 전투기끼리 충돌한 적도 있고. 해마다 양쪽 다 군인 몇 명씩은 죽어. 비공식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지.
Kwon: 요즘 그리스는 어때? 계속 IMF(국제통화기금) 반대 파업 중이야? 얼마 전 아테네에서 여교사들 시위하는 외신 사진이 올라왔더라고. 시위대 중 사망자도 있다기에 네 걱정했었거든.
EIRINI: 사망자 나온 게 5월 5일인데, 그날 나도 (시위에) 나가려다 몸이 안 좋아 빠졌어. 우리 유치원 동료들은 많이 갔지. 파업은 계속될 거야.
Kwon: 몸조심해. 근데 시위가 왜 그렇게 격렬한 거지? 사람이 죽을 정도로….
EIRINI: (이리니의 말이 갑자기 길어졌다) 지금 그리스 문제는 첫째가 정치인 윤리, 둘째가 경제야. 물론 공무원 연봉 20% 삭감하고 연금 깎겠다는 말에 저항이 커진 거지만, 더 중요한 건 부패한 정치인과 실패한 정부가 책임을 국민한테 떠넘긴다는 거야. 세금 내면 정치인과 공무원 주머니로 들어갈 게 뻔한데 세금을 더 내라니 분노할 수밖에. 어제도 만델리스라는 전직 장관이 지멘스(독일 전자기기업체)에서 뇌물 받았다고 인정했거든. 사람들은 IMF 원조금도 결국 몇몇 정치인 배만 불릴 거라고 생각해.
Kwon: 거기도 정치인들이 문제군.
EIRINI: 여러 얘기가 나오고 있어.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상황이 나쁜데 왜 그리스만 타깃이 되냐는 불만도 있고, 미국의 음모란 얘기도 있고.
Kwon: 한국이 IMF 선배잖아. 내 경험으론 파업한다고 별로 나아지는 게 없을 걸.
EIRINI: 우리도 상황이 나쁘단 걸 알아. 하지만 이건 정의(justice)의 문제라고. 정부를 압박하고 부패한 정치인 도려내면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들 믿고 있어.
Kwon: 근데 너 아테네에다 아파트 사려 한다고 했었잖아(이리니는 로펌에서 비서로 일하는 동생과 함께 아테네에서 방을 얻어 자취하고 있다). IMF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땡빚을 내서라도 지금 집을 사야 돼. 한국에선 IMF 끝나고 집값이 배로 뛰었거든.
EIRINI: 안 그래도 지난해부터 동생이랑 아파트 보러 다녔는데, 내 연봉도 20% 깎였어. 게다가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Kwon: 윽, 그렇군.
EIRINI: 내 사촌도 직장에서 해고됐다가 다행히 최근 다시 취직했어.
Kwon: 잘 됐네! 요즘 한국에서 재취업은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야.
EIRINI: 너희도 타격이 있는 거야?
Kwon: 고생하는 너한테 할 말은 아니다만, 유럽 위기로 나도 타격이 커. 3년 전 들었던 유럽 펀드가 만기됐는데, 수익률이 마이너스 51%! 펀드 들 때 유럽이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나저나 갑자기 그리스랑 한국이 같이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구먼.
EIRINI: 안 좋은 쪽으로 말이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내 친구가, 여자애인데, 세미나 때문에 노르웨이에 갔는데, 그리스에서 왔다니까 다들 어떻게 왔냐, 돌아갈 여비는 있냐, 묻더라는 거야.
Kwon: 저런!
EIRINI: 더 웃긴 건, 자칭 ‘부자 어부’라는 현지인 두 명이 내 친구한테 프러포즈를 했는데, “네 형편이 나쁘겠지만 나한테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결혼하면 여름마다 그리스에 가자”고 했다는 거야.
Kwon: 무례한 데다 멍청하기까지!
EIRINI: 우린 이런 걸로라도 웃고 살아.
Kwon: 근데 너 축구 좋아해?
EIRINI: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길 때만^^.
Kwon: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이랑 그리스가 붙는 거 알아?
EIRINI: 몰랐는데.
Kwon: 너 확실히 축구팬은 아니구나^^. 축구가 그리스에서 최고 인기 스포츠라던데.
EIRINI: 그건 맞아. 내가 관심 없는 건 우리 대표팀의 승산이 별로 없어서야. 여기선 메시(아르헨티나 공격수)가 우리 팀이랑 경기한다는 사실에 더 흥분하고 있어.
Kwon: 그거 알아?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한국 그리스가 같은 B조인데, 네 나라 모두 IMF를 겪었다는 거. 한국 사람들은 그리스를 꼭 이길 거라고 믿어.
EIRINI: 네 얘기가 맞겠지.
Kwon: 아니, 그래도 넌 그리스를 응원해야지.
EIRINI: 응원은 해. 근데 지금 그리스팀은 베스트가 아니라니까.
Kwon: 오∼ 그래?
EIRINI: 주전들은 너무 나이가 많고, 젊은 선수들은 국제경기 경험이 너무 적고. 2004년 유럽선수권대회 우승할 때 멤버 거의 그대로야. 게다가 이 시점에 감독이 독일 사람이라니, 믿어지냐!!
Kwon: 무지 유명한 감독이라며. 독일사람 싫어해?
EIRINI: 아니, 그 감독 덕에 2004년 우승도 하기는 했는데, 지금 상황에선 좀 아이러니컬해서.
Kwon: 아, 메르켈 때문에(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리스 재정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EIRINI: 그렇지. 여기선 사르코지가 훨씬 인기가 많아(메르켈 총리 앞에서 탁자를 내리쳐가며 그리스 지원을 설득했던 사람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다).
Kwon: 아무튼, 시위하러 가더라도 몸조심해.
EIRINI: 그래. 너도 조심해. 전쟁이야 안 나겠지만. 월드컵 재미있게 보고. 필리아(그리스어로 우정을 뜻하는, 헤어질 때 쓰는 인사말)!
Kwon: 응, 또 보자. 필리아!
한국과 그리스. 이리니를 처음 만났을 때 공통점이라고는 이리니의 노트북을 한국 기업이 만들었다는 것뿐이었다. 불과 3년 만에 부쩍 인연이 늘었다. 달갑지 않은 ‘IMF 동창생’이 됐고, 남아공월드컵에선 같은 조 라이벌이다. 북한 때문에 심란한 한국이나, 경제 문제로 허리 휘는 그리스 사람들을 위해 두 나라가 나란히 월드컵 16강에 오를 순 없을까?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어떻게 안 되겠니?
권혜숙 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