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4) 무능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준 상처는 ‘인생의 보약’
입력 2010-06-03 20:42
농사짓는 일이 고달팠지만 아버지가 가끔 주는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28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학교 문턱을 넘은 적이 없다. 33년생인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형제는 9남매였지만 제대로 얼굴은 뵌 분은 몇 안됐다. 일제 징용에 끌려가거나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평생 떠돌이로 살고 계시는 분 등 대부분 기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 통에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가 맘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는 세계적인 격동기였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 이념 대결은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 놓았다. 더군다나 전쟁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지 10수년밖에 안된 남한은 반공과 민주주의, 경제발전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분단의 질곡과 정신적 아노미 상태의 지식인들은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영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다. 이웃나라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온 대륙이 숙청과 파괴의 현장으로 변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도 재빠르게 독일을 따돌리고 세계 2위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흑인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케네디 형제의 죽음,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 마리화나와 히피 문화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내가 태어난 66년에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불러 유명해졌다. 이들은 또 이듬해에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한 영화 ‘졸업’의 주제가를 불러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69년에는 인간이 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해 우주 천문 과학 분야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다. 우리집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인 변화와는 무관했다. 아버지는 지식과 경제력, 권력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농부였다. 무지한 농부의 몸으로 잔혹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견뎠다. 결국 술로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며 가족을 건사하기에 바빴다.
아버지의 무능함은 어머니와 6남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큰누나(옥정)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해야 했다. 맏이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막둥이를 업어 키웠다.
둘째누나(국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전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큰형(성태)과 작은형(일강)도 자신의 미래를 맘대로 설계할 수 없었다. 막내누나(현정)는 어머니(국예환)가 허리 디스크로 투병하고부터 어머니 대신 집안일과 아버지 수발을 도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준 상처는 훗날 보약이 됐다. 우리 형제들은 가난과 불행을 이어받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특히 둘째누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나 인생이 확 바뀌었다. 결혼 후까지 이어진 가난의 굴레를 모두 떨치고 지금은 대전시 가장동 대전중앙감리교회(안승철 목사)의 심방 전도사가 됐다.
둘째누나는 나에게 수호천사였다. 76년 어느 날 대전에서 회사를 다니던 누나가 목발을 사가지고 왔다. “철봉에 아무리 매달려도 걸을 수 없다. 이제부터 이 목발을 짚고 걸어라. 엄마도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 너를 업을 수 없잖아. 목발을 짚고 나와 함께 대전으로 가자.” 한동안 나는 목발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누나가 야속하고 미웠다. 목발을 잡는 순간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