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서 기념비 제막식
입력 2010-06-02 21:27
우리나라 기독교 문서 선교의 선구자인 프랭클린 올링거 (1845∼1919)선교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진다. (재)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 협의회(이사장 강병훈 목사)는 “4일 오전 11시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서 ‘올링거 선교사 기념비’ 제막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제막식에는 올링거 선교사의 4대 후손 데이비드 올링거 부부와 그가 속했던 감리교단과 배재학당, 인천 내리교회, 정동교회, 대한기독교서회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협의회 관계자는 “앞으로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의 후손들을 초청해 선교사들의 정신, 양화진과의 인연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는 올링거 미국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과 딸의 묘지가 있다. 1888년 1월 한국으로 건너 온 그는 한국 선교 6년째인 1893년 5∼6월 두 자녀를 편도선염으로 잃었다. 당시 양화진에 묻힌 12살 난 아들 버티와 9살 난 딸 윌라는 조선에서 사망한 최초의 서양 어린이로 기록됐다.
협의회 측은 지난해 11월 양화진문화원에서 한 미국 선교사를 인터뷰하다 이 같은 사연을 들었다. 이후 유족들과 35차례나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버티와 윌라가 묻힌 자리를 확인했고, 그 자리에 올링거 선교사의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두 어린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동시에 올링거 선교사의 선교 정신을 되새긴다는 취지에서다.
올링거 선교사는 17년간 중국 선교를 한 뒤 42세 때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5년8개월간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인쇄와 출판, 교육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 최초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배재학당에 설립했고 국내 최초의 영문 잡지인 ‘The Korean Recorder’와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를 출간했다. 그가 쓴 설교학 목회학 저서들은 한국과 중국, 일본 신학교 교재로 채택됐고, 특히 ‘기독교문명론’은 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19세기 말 선교 신학의 주요 흐름으로 인정받았다.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 파송 첫해 인천 내리교회 개척에 관여했고 1890∼1893년 정동교회를 담임했다. 한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김창식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중 전도해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1890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션셩교서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