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 바이블] 혼란의 시대 ‘좁은 길’을 찾아서
입력 2010-06-01 17:27
‘□□□의 종말’이 판치는 세상, 교회가 희망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어느 인적이 드문 산속 깊고 깊은 갱도 밑바닥에 목숨을 걸어가며 석탄과 싸우는 리얼한 실존이 막장의 원래 의미이다. 그 안에는 인간 생존의 진지한 열정이 들어 있고, 가족을 부양하려는 아버지들의 절절한 삶의 애환이 스며 있다. 이 존엄에 가까운 단어가 지금 미디어에서 한낱 눈요깃거리에 미치지 못하는 쇼로 탈바꿈되고 있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그것이다.
막장이라 불리는 극들은 고부간의 갈등 같은 전통적인 소재를 지나서 이제는 남편의 애인, 아내의 애인 등 불륜 소재로 확대되고, 극 전개에 따라 드러나는 출생의 비밀과 애정의 삼각관계는 도를 지나쳐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런 막장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려는 것인가. 그렇게 해 동시대인들의 반성과 회개를 이끌어내려는 것인가. 의도는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인간의 죄악상과 가정해체, 인간의 종말이라는 소재를 최대한 소비하려는 저의가 엿보인다.
남의 비극으로 쾌락을 맛보려는 ‘새디즘적’ 관음증은 아닌가. 결국 시청률 싸움에서 승리하여 ‘이 바닥’에서 생존해보려는 비열한 욕망이었던 것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막장 뒤에 도사린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막장과 함께 우리 시대를 횡행하는 용어들이 바로 그 정체들이다. 몇 가지 열거해 보면 이렇다. 우선 2012년에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란다. ‘2012’라는 제목의 영화는 대재난을 그 원인으로 설정했다.
이 밖에 공교육의 폐단을 노래하는 학교의 종말, 다양한 환경 변화로 고초를 겪는 가정의 종말, 일해도 가난과 씨름해야 하는 노동의 종말,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돼 가는 과식의 종말, 신생아들의 울음소리가 자꾸 줄어드는 출산의 종말, 그와는 거꾸로 생명 연장이 가져다주는 축복 아닌 저주로 뒤바뀔지도 모를 고령의 종말 등이 있다. 이뿐 아니다. 여기저기 용하다는 정보를 찾아다니다 허무로 끝나버리는 접속의 종말, 돈 되는 데에 기웃거리다 패가망신하는 투기의 종말, 소비는 미덕이고 소비자는 왕이라는 소비의 종말, 너 죽고 나 죽자고 싸우는 정치의 종말, 그래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권력과 폭력의 종말, 국가의 종말, 사회의 종말, 종교도 정치적 편견과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고 있는 종교의 종말, 개인 이기주의로 치닫는 신앙의 종말 등도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시대의 병적 증후군인 인간의 종말로 귀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종말이 종말을 고하는 이 시대에 희망마저 종언을 고하고 있단 말인가.
비록 우리 시대에 ‘종말의 종말’이 화산재처럼 대지를 덮을지라도, 그래서 어둠이 기습할지라도 희망이 있다, 우리가 아직 교회의 종말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희망은 있는 것이다. 그곳은 어머니가 짜주는 생명의 젖이 흐르고 아버지의 따스한 손이 우리를 세워주신다. 태양이 빛을 잃는다 해도 거기에서 생명과 소생의 빛이 비추인다. 비록 종말의 종말 시대에 돌입했다 할지라도 교회가 종말을 맞지 않았다면 구원은 있는 것이다.
구원의 주 예수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위협적인 종말의 파괴력, 가공할 시대정신도 이 믿음의 반석을 어찌하지 못하리라. 교회여 일어나 구원을 선포하소서.
추태화(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