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2) 유명 의사도 “가망 없어요”… 집안은 마치 전쟁난 듯
입력 2010-06-01 17:23
“과수원집 막둥이가 걸을 수 없게 됐다는구먼, 인강이 어머니 아버지 불쌍혀서 워쩐디야.”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자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무척 걱정해줬다. 위로의 말도 때론 욕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그까짓 거 괜찮아유, 나아지겠지유. 멀쩡한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뭘유”하며 넘어가다가도 고주망태가 된 날은 달랐다. 집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밥상이 뒤집어지고 세간이 풍비박산이 났다.
“자식이 저렇게 되도록 도대체 뭘 한겨. 여편네가 무식헌게 아이가 절름발이 된겨.”
나를 제외한 누나와 형들은 잘도 피했다. 하지만 다 큰 아들을 업고 도망가야 하는 어머니와 나는 달랐다. 아버지의 신세타령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동구 밖에서 이슬을 맞았다.
한글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만 못 살게 굴었다. 한 판 전쟁을 치른 듯한 그 긴 밤이 깊어가면서 어머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인강아, 걱정 말그라. 내 몸이 바스라져도 니를 고쳐줄텨. 내가 니 때문이라도 살겨.”
병원도 학교도, 전기도 없었던 외딴집에서 유년 시절을 혼자 지내야 했다. 고독이 무엇인지,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는지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홀로 배웠다. 병아리와 강아지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놀다 자고 다시 깨면 또 그들과 놀았다.
따스한 봄볕, 황량한 앞뜰에서 희망처럼 꿈틀거리며 마른 대지 위에서 하늘로 올라가던 아지랑이, 과수원을 물들이던 연분홍 복숭아꽃, 원추리, 붓꽃들, 우물가의 포도나무와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던 종달새의 노래, 아카시아 꽃향기, 신작로에 피던 코스모스의 한들거림, 나는 이 소중한 죽마고우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내가 아프고 나서 사방팔방으로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한번은 순천에 살고 있는 고모의 소개로 순천에 있는 한 병원을 찾았다. 병원장은 환자를 잘 돌보는 소문난 의사였다. “(너)노무 늦었어요. 가망이 없어요. 집에 가서 기도 많이 하세요.”
어머니는 나를 업고 나오며 무척이나 서럽게 우셨다. “미국 의사도 별수 없나벼. 돌팔이 의사가 무슨 예수 믿고 기도나 하라는 겨.” 어머니 등 뒤에 나도 따라 울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먼 산 너머로 지던 황혼의 해거름을 넋 나간 아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내 인생은 항상 저렇게 서글프게 지는 석양처럼 가슴앓이하며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지금도 나는 지는 해를 보면 괜히 숙연해지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내 가슴을 적신다.
어느 해에는 사촌 누나의 소개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모자는 아무리 눈을 감고 껌을 씹고, 박카스를 먹어도 결국 버스가 정차할 때면 토해냈다.
사촌 누나가 일하던 그 집에 며칠 동안 머물다가 유명하다는 의사 선생님을 뵈러 갔다. 그분도 마찬가지였다. “재활치료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재활치료가 뭔지도 모르는 어머니는 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버지는 마당 한 편에 철봉대 같은 것을 만들어 주셨다.
입학할 때가 돼서 어머니는 나를 업고 1시간을 걸어서 초등학교에 갔다. 아홉 살 누나와 함께였다. 누나는 내가 혹시나 다리가 좀 좋아져 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입학을 미루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시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