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문학으로 본 전쟁과 기억] 릴레이 인터뷰 ③ 문학평론가 유종호
입력 2010-06-01 17:40
상처는 아물었지만 기억으로 남은 아픈 흉터…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물 입구에는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라는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글이 적혀 있다. 열일곱 살 때 경험한 6·25 전쟁의 상흔을 에세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현대문학)에 생생하게 담아낸 한국 문단의 1세대 평론가 유종호(75)씨는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많이 상처받았다는 것이고 많이 아팠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951년 중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야 할 그해, 1·4후퇴 당시의 피란길에서부터 학교로 되돌아간 가을까지 신산스런 한국전쟁의 풍경을 청소년기에 그 만큼 온몸으로 체험한 이도 드물 것이다. 또 이 시절의 경험을 그 만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목동 자택에서 그에게 6·25는 무엇이며 60년 전의 전쟁은 무엇을 남겼는지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천안함 침몰 사태로 불거진 한반도의 긴장상황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꼿꼿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이 바로 전쟁 중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태평무드에 젖어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터져도 위기감이 별로 없어요.” 그가 느끼는 ‘지금 전쟁 중’이라는 상황인식은 청소년 시절 겪은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6·25가 되면 생각 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피란의 기억이에요. 당시 충주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충주 근처 달천으로, 달천에서 다시 원주로 미군을 따라다니며 전전했지요. 국도를 꽉 메운 인파, 고갯길을 넘을 때 내리던 함박눈, 스물댓 명이 한 방에 움츠리고 잠을 청했던 포성 울리던 밤. 저는 문학지망생이었는데 전쟁의 아수라판에서 아픔의 흉터로 남았으니, 저뿐만 아니라 모두의 꿈을 앗아간 것이 전쟁이지요.”
그의 피란시절은 에세이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너무 까마득해서 정확한 날짜는 이제 헤아릴 길이 없다. 어느날 갑자기 당장 집을 떠나 피란을 가라는 공고가 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엄동설한에 광목천의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떠나자니 속이 시려왔다. 서둘러 점심을 대충 먹고 난 뒤였다.”
-전쟁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설레는 사춘기를 전쟁통에 보냈으니 ‘별을 그리는 부나비의 꿈’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이라고나 할까요. 평생 회복하지 못할 소년 상실 같은 것이죠. 그때에 비하면 요즘 청소년들은 얼마나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지 잘 몰라요. 6·25를 북침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고 전쟁을 너무 감상적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요. 이런 인식을 바로잡아 줄 만한 문학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피란시절 그는 미군 보급부대에서 일거리를 얻었다. 보급품을 화물열차에서 하역하고 다시 ‘칸보이’에 옮겨 싣는 노무자들을 관리하는 미 해병대 노동사무소 최하위 말단 고용인 ‘재니터(janitor)’가 그의 첫 이력이었다. 다짜고짜 부대로 찾아가 “헬로, 아이 원트 투 워크”라고 말한 덕분에 얻은 일거리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군 장교, 한국인 통역, 다양한 부류의 노무자들을 만났다.
-미군 부대 경험은 어땠습니까.
“생존이란 본원적인 치욕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먹어야 살고, 그래서 사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치욕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치욕을 빌미로 세상에는 같은 인간들을 능멸하고, 눙치고, 어르는 이들이 많아요. 엉터리 영어 조금 읊조릴 수 있는 덕분에 통역 자리를 얻어 뻐기고 우쭐대는 대학생, 병 주고 약 주고, 웃으면서 뺨치는 반장, 담요 한 장과 알량한 임금을 넘겨주면서 못살게 구는 미군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많았죠.”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자들이 몰살해 두 집 건너 과부가 사는 과붓집 마을, 아들은 대한민국 군경에, 사위는 인공 때 부역세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 등 몇 달 사이에 아들과 사위, 며느리까지 잃은 백부 이야기 등 그가 만난 사연들은 분단시대 아픔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중에도 그는 문학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썼다. “미군 부대에서 받은 돈으로 서정주 시인의 시집을 큰마음 먹고 사기도 하고, 시를 끼적이기도 했어요.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데 무슨 청승을 떨고 있느냐, 그런 걸 끼적거릴 생각이 나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고 막막하기 때문에 이런 낙서도 해본 것이죠.”
그는 문학평론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을 다룬 문학작품이 6·25에 대해 엄밀히 관찰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공주의를 내세운 것도 있고 공산주의자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인본주의에 입각한 작품도 있지만 피상적으로만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의 초긴장 상태가 해소되려면 남북이 한 발짝씩 물러나야 하지만 전쟁이란 양보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관성에서 벗어나 더욱 치밀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작품이 절실해요.”
-60년 전의 세월을 돌아보면 감회가 어떻습니까.
“얼마전 옛날을 회상하며 원주 쪽에 갔어요. 전쟁 중에도 목욕을 하고 팔매질을 했던 강가는 이제 유원지로 변했고 막사가 있던 언덕도 숲이 됐더군요. 황량하던 마을은 낚시터와 놀이터로 바뀌고 백발노인 한 명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전쟁의 상처도 점점 잊혀져 가겠지요. 하지만 1951년의 경험을 적은 제 기록이 무기력한 망각에 저항하는 끈질긴 기억의 투쟁에 기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고 기억력마저 떨어지지만 강렬한 충격은 정신적 외상으로 각인돼 마치 필름을 돌려보듯 반복적으로 떠오른다”면서 “최근 일은 금세 잊어버리곤 하는데 6·25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지나간 고난을 잊어버리는 것은 그 고난을 야기했던 힘들을 무찌르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라는 철학자 마르쿠제의 말을 인용한 자신의 에세이 한 대목을 소개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많이 기억하는 쪽이 약자이며 강자는 결코 기억하지 않는다는 깨우침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삶의 강제가 안겨준 아픔의 흉터가 아니라면 기억이란 대체 무엇인가? 기억은 상처입은 자존심이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내적 독백이다. 용서되지 않는 것이 주체이건 타자이건 우리를 번롱(?弄)하는 우연과 필연의 거역할 길 없이 막강한 힘이건. 그러니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