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10월의 미사일

입력 2010-05-31 18:00


5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북한을 무척 싫어하셨다. 북한이 고향이었던 아버지는 재산과 가족들을 앗아간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그곳이 고울 리 없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시초프에 대해서만은 후한 평가를 했다. 그가 전 세계를 엄청난 불행에 몰아넣을 수 있었던 핵전쟁을 막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1962년 10월 발생한 쿠바미사일 사태 시 미국과 소련이 벌였던 피 말리는 전략적인 싸움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가 ‘현명한 항복’을 해 위기를 넘겼다고 봤다. 위기를 조성한 주체는 소련이었지만 끝까지 고집부리지 않고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포기할 줄 아는 결단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1962년 10월 미·소는 13일간 전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힘으로 무장한 채 으르렁거렸다. 미·소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핵전쟁이 될 것이고 핵전쟁은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임을 잘 알면서도 전쟁의 문턱까지 갔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생적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대량의 무기를 쿠바에 반입했다. 이런 소련의 행태는 비밀이 아니었다. 소련은 ‘방어적 무기’만 제공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방어용 무기는 묵인하겠지만 ‘공격용 무기’의 반입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탄도미사일이 공격용 무기라는 것은 양측 모두 인정하는 사항이었다.

소련으로서는 쿠바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기지를 가질 수 있다면 전략적으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쿠바는 미국 바로 아래 카리브 해역에 있다. 미국은 소련이 그 같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카리브 해역에서 미 군사력은 소련을 압도했고 핵전력도 미국이 소련 핵전력을 무력화할 수 있을 만큼 앞서 있었다.

그러나 10월 16일 미국은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기지를 건설 중인 것을 발견했다. 뒤통수를 맞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긴급 집행위원회(ExCom)를 소집했고 일주일간 모든 대안을 검토했다. 미사일 반입을 묵인한다는 안에서부터 공중공격을 통한 미사일기지 파괴, 쿠바의 수장 카스트로를 제거하는 전면침공까지 다양한 안이 탁자에 올랐다. 미국은 소련 미사일 철수를 위해 단호한 입장을 과시해야 했다. 그러나 소련에게 생각할 시간과 체면을 잃지 않은 채 후퇴할 수 있는 여지도 주어야 했다. 그래서 채택된 것이 해상봉쇄였다.

22일 케네디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외교정책연설을 했다. 쿠바로 향하는 모든 선박에 실린 공격용 군사장비를 철저히 차단할 것이며 흐루시초프 위원장은 도발적인 위협을 당장 중단하고 미사일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핵탄두를 탑재한 미 전략공군사령부 소속 전폭기들이 33곳의 미국 내 기지에서 비상경계에 들어갔고 영국과 스페인 전진기지에도 배치됐다. 소련 선박이 봉쇄선에 집결한 미군함정에 접근하고 있을 때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에게 “우리는 모두 신중함을 보여 지금보다 더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 어떠한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서한을 보냈다. 흐루시초프는 “우리 선박들이 접촉하면 군사적 갈등의 불똥이 될 수 있소. 그 후에는 어떤 대화도 의미가 없게 될 것이오. 왜냐면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힘과 법칙이 지배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오. 바로 전쟁의 법칙 말이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28일 아침, 흐루시초프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격용이라고 주장하는 무기를 해체해 다시 소련으로 가져올 것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충돌을 피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 터키에 배치했던 중거리미사일을 제거한다는 비밀약속을 한 대가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지는 싸움에 무모한 도박을 하는 어리석음을 피했다.

6월의 한반도에서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돌아보는 것은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흐루시초프의 현명한 자세가 필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