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1) 인생 고비마다 ‘기적의 목발’로 부축해 준 당신
입력 2010-06-01 13:59
시간은 정말 화살처럼 빠르다. 복사꽃이 피는가 싶더니 어느덧 신록의 계절이다. 서울 청량리동에 자리 잡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2층 내 연구실 창밖 6월의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싱그럽다. 정들었던 서울대를 떠나 이 조용하고 아담한 연구실의 책상을 지킨 지도 1년6개월이 됐다.
이맘때쯤 서울대 캠퍼스는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나는 꽃이 언제 피고 어떻게 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수시로 찾아오는 학생, 박사과정생들과 토론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2007년 젊은 과학자상을 받고부터 좀 더 연구에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내 고등과학원 교수로 오게 됐다. 나의 연구실은 고즈넉한 여유로움도 있지만 어떨 땐 적막한 산속 같을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45년 세월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꽤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두 살 때 소아마비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시절과 대전 재활원에서 보냈던 10대 초반의 막막했던 시간들, 고난스럽고 혼돈스러웠던 청소년기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차마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각인돼 있다. 나는 신병훈련소로 유명한 충남 논산시 연무대 인근 과수원집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걸을 수 없게 됐다. 또래 친구들이 모두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난 형과 누나들의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쳤다.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달과 별과 은하수를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다. 나는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세 번의 달을 기억한다. 처음의 달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어머니 등에 업혀 과수원 한구석에서 바라보던 초겨울의 달. 두 번째의 달은 나름대로 인생의 계획을 안고 먼 유학길에 올라 외롭고 힘들면 찬송가를 부르며 바라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만 위에 떠 있던 큰 달이다. 세 번째는 삶에 지치고 피곤해 떠났던 인도의 라지스탄 사막에서 바라보던 모래사구 위에 떠 있던 달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한순간이라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었다. 장애인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여 입학을 허락하셨다. 1981년 연합고사 만점이라는 선물도 주셨다. 서울대 수학과 합격의 영광도 받았다. 신림9동 지하 월세방 신세였지만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유학도 보내주셨다. 광야와 같은 세월을 지나 고등과학원의 교수로 서기까지 내 인생의 모퉁이마다 그분은 ‘기적의 목발’로 부축해 주셨다.
나는 목발을 짚고 양쪽 폐가 터지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의지하며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별로 자랑할 것이 없지만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를 통해 창조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이 담긴 삶과 신앙의 향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약력=1966년생, 대전중, 충남고, 서울대 수학과 졸업, 미국 버클리대 박사, KAIST·서울대 교수 역임,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서울 행운동 예수마을교회 집사.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