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즈벡·카자흐인 돕는 윤영숙 열방선교회 목사 “한국 온 손님, 현지 선교사로 키워야죠”
입력 2010-05-30 19:18
29일 오전 서울 조원동(옛 신림8동)의 작은 빌딩 5층. 좁은 복도를 따라 놓인 신발장에 남녀 신발 수십 켤레가 가득했다.
“마마, 손님!”
기자를 본 백인 여성이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짧은 파마머리를 한 윤영숙(58·사진) 목사가 걸어 나왔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옛 소련 지역에서 돈벌이를 위해, 혹은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왔다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마마’(러시아어로 엄마)라고 불렀다.
윤 목사가 9년째 이끌고 있는 열방선교회에는 현재 25명의 외국인이 머물고 있다. 고려인 후손부터 백인까지,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몸이 불편하거나 질병이 있다고 했다.
이들을 돌보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윤 목사는 어머니 얘기부터 꺼냈다. 그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49세였던 어머니가 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평생 믿음이 좋았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내 몸에 칼이라도 한번 대보고 죽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돈을 마련하지 못해 어머니는 끝내 수술을 못 받고 숨을 거뒀다.
“그때 일은 평생의 상처로 남았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나에게 아픔을 남긴 것이 어머니의 사명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린 시절 고향인 전남 여수 서문교회에서 어머니를 따라 신앙생활을 했던 윤 목사는 39세 때 사업이 망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다. 당시 물도 못 마실 정도로 기력을 잃고, 하루하루 자살만 생각하고 살 던 무렵 오빠의 권유로 교회에 갔다가 성령 임재를 체험했다. 눈물로 기도하는데 박하사탕을 먹었을 때의 화한 느낌이 온 몸을 감쌌다고 한다.
윤 목사는 신학교에 진학, 2001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4월에는 한 상가건물 지하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런데 신학교 후배였던 고려인 3세를 통해 외국인들이 하나 둘 교회로 와 머물기 시작했고 한 달이 지났을 때는 그 수가 20여명으로 늘었다. 윤 목사는 아예 이들을 위한 사역에 전력키로 결심했다.
한국에 들어왔다가 병이 생기거나 오갈 데 없어진 외국인들이 입소문을 듣고 ‘마마’를 찾아왔다. 그렇게 지금껏 2000여명이 선교회를 거쳐 갔다. 500여명이 윤 목사의 도움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수십 명은 큰돈이 드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혈우병으로 당장 수술이 필요한 키르기스스탄 청년, 자궁 수술을 받은 고려인 여성,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지하철에 투신했던 러시아 여성 등이 함께 생활한다.
윤 목사는 이들을 단순히 불쌍한 외국인으로만 보지 않는다. 앞으로 고국으로 돌아가 중앙아시아와 이슬람권을 변화시킬 주님의 자녀들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열방선교회가 매일 오전 2시간, 저녁 2시간30분씩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를 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선교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재정 문제였다. 전기나 가스 공급이 끊기는 것은 예사이고, 자신의 두 딸들에게까지 큰돈을 빚져야 했다. 현재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사글세방에 살고 있는데 13개월치 월세가 밀려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성령님이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시며 윤 목사를 일으켜 세웠고, 선한 후원자들의 도움도 있어 버텨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열방선교회는 지금도 중대 위기다. 설립 이후 네 번째 마련한 지금의 거처가 경매로 넘어간 것이다. 경매 낙찰자는 다음달 10일까지 비워달라고 통고해왔다. 윤 목사는 수소문 끝에 경기도 안산에 급매물로 나온 교회 건물을 찾아냈지만 역시 비용이 문제다.
“이 사역은 ‘윤 목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좌절하지 않습니다. 안산에 가서 다른 나라 민족들도 품으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열방선교회 ilovean.com·02-838-0144)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