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영화를 잘 보려면

입력 2010-05-30 17:57


“영화 보는 게 직업입니다” 하면 열이면 열명 다 “정말 부러워요!” 탄성을 지른다. 호기심이 많은 반면 금방 싫증내는 성격 때문에 뭐 하나 꾸준히 해온 게 없지만, 유일하게 영화 보는 것만은 질리지 않았다. 글을 깨치기 전부터 영화에 빠져들었고,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졌으니 나는 분명 복 받은 사람이다.

직업에 따른 애환이 없지는 않다. 하루 서너 편의 영화를 보는 데 따른 시력 저하 걱정, 영화 100년사의 고전을 다 보지 못하고 죽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예전에 본 영화를 기억해내지 못할 때의 공포와 절망은 취미로 영화 보는 이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방법은 두 가지. 최적의 컨디션으로 영화를 보고 기억 속에 잘 갈무리해 두기 위한 체력 단련, 영화사의 걸작으로 남을 확률이 희박한 영화 보지 않기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마라톤은 못할망정 걷기와 요가, 아침 6시 기상 밤 11시 취침으로 건강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가벼운 몸으로 하루 두 편 이상의 영화를 보는 게 나의 건강 목표다.

영화 가려 보기는 건강 지키기보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다. 수준 미달 영화도 봐야 걸작이 더 잘 보인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보고 글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은 영화 취향이 극단적이면 안 된다느니, 장르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말도 듣는다. 그러나 현실 생활보다 영화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이제는 정말 영화를 가려 봐야겠다, 나쁜 영화는 충분히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보기 힘든 영화는 공포와 액션 영화다. 음산한 음악만 흘러도 심장이 오그라들고, 살인마가 칼을 휘두르면 내가 찔린 것처럼 아프다. 빠른 화면 전환과 귀청을 때리는 사운드로 압박하는 액션 영화를 보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걷기도 힘들다. 오랜 세월 스크린에 펼쳐지는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은 가상 세계로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 빠져 사는 이들은 현실감각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나 역시 “영화에선 두 시간 내에 사건이 다 풀리는데 현실은 왜 이리 복잡한 거야”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더더욱 영화 세계를 탐하고, 더 비현실적이 되고, 이런 되풀이가 심화된다.

그래도 영화를 보며 살아온 세월이 행복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걸작을 만들었는데, 시시한 영화를 보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유령작가’와 ‘셔터 아일랜드’ 시사회가 끝난 뒤 “도대체 무슨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네”라는 젊은 기자들 반응을 보며 영화도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고전부터 차근차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발레의 몸동작 의미를 알지 못하면 고전 발레 감상이 반쪽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영화도 그렇다. 천재적인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만든 문법을 차근차근 배워온 사람만이 현대의 걸작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