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갈망 감각적 필치로 녹이다… 소설집 ‘감각의 시절’ 펴낸 이신조
입력 2010-05-28 17:39
“더 이상 내가 젊지 않은 것은 아니겠으나, 이제 분명 청춘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너무 일찌감치 좋아했던 그 구절을 자연스럽게 중얼거릴 수 있다. 나쁘지 않다. -잘 가라, 내 청춘.”(‘작가의 말’ 중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세계를 감각적이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는 소설가 이신조(36)가 세 번째 소설집 ‘감각의 시절’(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가장 최근에 소설집을 낸 게 2005년(‘새로운 천사’)이고, 장편 ‘가상도시백서’가 나온 게 2004년이니 단행본으로는 오랜만에 독자들을 찾아가는 셈이다.
27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작가의 표정은 이틀째 이어진 쾌청한 하늘만큼이나 밝아 보였다. 그 표정은 작가적 고민이 초래한 방황과 혼돈의 시기를 빠져나온 데서 오는 여유로움에 닿아 있었다. 그는 30대 초반의 지난 몇 년간이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말문을 열었다. “스물다섯에 비교적 일찍, 운이 좋을 정도로 쉽게 등단했어요. 그래서 처음 5년 정도는 별다른 고민없이 내 안의 것을 단순히 끄집어 내는 식으로 글을 써왔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생기고 생각도 많아지면서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졌지요.”
그는 “작가는, 소설은, 글쓰기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다”며 “(작가로서) 더 깊어지기 위한 통과의례를 겪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소설집에 대해 “힘들었던 지난 시기를 종합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제목도 수록작이 아닌 그 시절을 암시하는 ‘감각의 시절’로 정했다”고 덧붙였다. 작가는 이번에도 이전의 작품들처럼 버림받고 소외된 존재들 간의 소통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치열한 고민의 시기를 거쳤기 때문인지 이전 소설들과는 다른 인물상을 보여준다.
수록작 ‘흩어지는 아이들의 도시’는 속칭 비둘기 폐렴이라 불리는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돼 종말을 맞은 도시에 내던져진 16세 미혼모가 고난을 딛고 ‘세상의 어머니’로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버림받고 소외된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전의 제 작품들은 대부분 죽음이나 비극으로 결말을 맺었는데 이번에는 거기서 한 단 계 더 나아가는 인물을 그리려 했다”며 “힘든 시기를 견뎌내고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말했다.
서울 외곽의 한 작은 도시에 사는 초로의 부인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흑인 가족을 만나 정을 나누는 이야기를 그린 ‘엄마와 빅토리아’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소통의 중요성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작가는 “나와 내 어머니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며 “나와 주변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작품화한 것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부분”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김영하가 이신조의 첫 작품집에 대해 “한 마리 고양이가 쓴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그는 예민하고, 까다롭고, 자신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려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세계를 드러낼 줄도 알게 됐고,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정도로 삶에 여유를 갖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소설집에는 ‘언어의 다름’으로 인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너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로 입양된 베로니크 파센이 자신의 어릴 적 이름 최선경을 둘러싸고 정체성 혼란을 겪다 뿌리를 찾아 나선 과정을 그린 ‘베로니크의 이중생활’ 등 8편의 단편이 실렸다.
그는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이름을 가려도 그것이 그의 작품이란 걸 알아요. 작가 윤대녕도 마찬가지죠. 제 이름을 가려도 그게 이신조의 소설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나만의 색깔을 갖고 싶어요.”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