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쉽게 쓰여지지 않는 시

입력 2010-05-27 18:04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영화 ‘시’가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는 낭보에도 살짝 섭섭하기까지 했다. 문인 출신인 이창동 감독이 만들고, 윤정희가 ‘문학소녀’ 할머니로 스크린에 복귀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줄곧 기대하고 응원해 왔던 터였다. 현란한 수사를 벗은 제목 ‘시’가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인들은 시가 죽었다고도 하고 대접받지 못한다고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시인의 고향에는 그의 이름을 딴 축제가 있고, 시가 피어난 자리마다 그 흔적을 기린다. 이달만 해도 충북 옥천에서는 ‘지용제’가, 서울에서는 ‘윤동주문학제’ ‘시인의 언덕 따라 걷기’ ‘낭송대회’ 등이 열렸다고 한다. 왁자한 풍경에 꼭 이래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조금쯤은 더 행복해졌으리라 믿고 싶다.

교토에도 윤동주와 정지용이 있다. 그들의 시비가 나란히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은 이제 제법 알려진 관광 코스다. 교정도 예쁘고 내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기도 해서 특별한 계획 없이도 오다가다 들르곤 하는데, 누가 갖다 놓는지 소담한 꽃다발이나 곰 인형 같은 것이 종종 놓여 있다. 시를, 혹은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 틀림없다.

칸의 낭보를 들은 날도 내 발길이 향한 곳은 다시 그곳이었다. 바로 극장으로 달려갈 수 없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어쩐지 영화가 아니라 ‘시’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윤동주의 시비에는 자필의 ‘서시’가, 정지용의 시비에는 교토를 노래한 ‘압천(鴨川)’이, 조금 작은 글씨의 일본어 번역과 함께 새겨져 있다. 코리아, 한국, 한글, 일본어, 형무소, 옥사, 한국전쟁, 행방불명…. 소개 글에서 단박 눈에 띄는 단어들만으로도 그들이 제각기 온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무게가 느껴진다.

언제 보아도 젊음이 넘치는 교정. 바로 그 교정에서 그들만큼이나 싱그러웠을 두 시인의 요절과 유랑을 되새기는 일은 슬프다. 시의 일본어 오역 논란, 관광자원화 혐의 등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역사의 굴레는 더 슬프다.

그러나 모든 존재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출발하는 것이 시이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아프게 껴안아야 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숙명이 아닐까. 불행히도, 아니 다행히도 시인이 될 수 없었던 나로서는, 모순과 고통 속에서 더 빛나는 그 시들을 가만히 읊어 볼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새삼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그 시는 난세의 영웅이 휘두른 장쾌한 칼날도, 불세출의 천재 시인이 내뱉은 벼락 같은 일갈도 아니다. 우주와 자신 앞에 온전히 홀로 서서 두렵고도 두렵게 더듬거렸던 외로운 한 인간의 노래일 뿐이다. 시인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이라 고백하지만, 결코 쉽게 쓰이지 않았을 그 ‘시’ 앞에서 나는 언제나 목이 멘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