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북한의 도발, 일본제국 末路를 보는 듯
입력 2010-05-27 18:00
“모험주의에 빠진 肢體를 서둘러 도려내고 국제협조노선으로 복귀해야 한다”
1931년 9월 19일 아침, 일본제국 황실은 우왕좌왕 분주했다. 전날 밤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과 봉천 군벌 장학량의 군대가 무력 충돌한 사실을 보도한 조간신문 때문이었다.
이른바 만주사변이다. 신문은 관동군의 발표를 인용했다. 장학량의 군대와 비적들이 봉천 북쪽에 위치한 류탸오후(柳條湖) 부근의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해 철도를 수비하고 있던 관동군이 자위 차원에서 장학량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폭파사건 직후 관동군은 조차지(租借地)를 벗어나 만철의 주요 거점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천황의 군대가 통수권자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부대를 움직였다는 점, 전투 사실이 정식 채널도 아닌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는 점 등은 군기문란의 극치였다. 군 상층부나 내각도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폭파 자작극을 통한 관동군 급진우익 장교들의 계획된 도발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날 아침 시종무관장 나라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어전회의 소집을 간언했다. 하지만 궁중 내 다른 천황 측근들은 이에 반대했다. 살아 있는 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천황이 직접 나섰다가 사태수습에 실패하면 천황의 위상에 금이 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히로히토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아니 그것은 말은 않지만 그가 내심 원하는 바를 직접 실행하는 급진우익 장교들에 대한 방조요 지원이었다. 1928년 관동군이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을 폭사시켰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때도 천황은 관련자를 벌하지 않았다.
히로히토는 천황의 군대가 제국의 판도를 확대하려고 하는 데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통수권 침해 사태가 빚어져도 결과가 좋으면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겉으론 국제협력을 강조하면서도 속으론 단기적인 제국의 이익 극대화를 택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없는 세상을 모색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계속됐다. 초점은 군축이었고 일본도 여기에 참여했다. 1928년에는 일본을 포함한 15개국이 침략전쟁 포기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규정하는 부전(不戰)조약, 즉 파리조약을 체결했다.
대외 협조노선과 일본제국의 팽창노선은 양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천황은 양 다리를 걸쳤다. 조약에 반대하는 급진파를 앞에선 비판하고 뒤로는 부추겼다. 1934년 일본제국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대외 협조노선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게 되지만 히로히토가 처음부터 대외 협조노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관동군의 군기문란과 명령불복종 사태는 물론 더 이상의 사태 악화도 없었을 것이다.
장작림 폭사 사건을 비롯해 만주사변, 열하(熱河) 침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태는 제국군대의 과대망상적 우익 이데올로기 구현과 히로히토의 적극적인 방조가 이뤄낸 합작품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일제는 인류 최초로 원지폭탄을 맞으면서 철저하게 몰락했다. 히로히토는 만주사변부터 시작된 15년에 걸친 전쟁에서 자국민 310만명뿐 아니라 2000만명 이상의 아시아 민중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생뚱맞게 일본제국의 몰락사를 거론하는 것은 북한의 천안함 도발이 만주사변 전후 일제의 행보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무오류의 살아 있는 신 천황과 3대 세습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절대권력 김정일, 절대 권력에 충성하는 제국군대와 북한군, 국제연맹 탈퇴 후 군비증강에 몰두한 일제와 NPT 탈퇴 후 핵무기 개발에 여념이 없는 북한은 여러 모로 닮았다.
천안함 도발이 김정일의 의도였는지, 군의 급진세력이 알아서 기어 벌인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문제는 향후 사태진전이다. 김정일이 히로히토처럼 군의 모험주의에 편승하여 사태를 방치한다면 북한의 몰락은 시간문제다.
몰락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있다. 모험주의에 빠진 지체(肢體)를 서둘러 도려내고 국제사회에 이해를 구하는 방법이다. 북한이 문제를 수습할 때 종종 동원하던 ‘극좌 모험주의의 책동’이라며 사과하는 방식이다. 일본인 납치문제가 극에 이르렀을 때도 그랬다.
북한은 지금 당장 수습해야 한다. 일제의 말로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인가. 근본적으론 대외 협조노선으로 복귀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