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미래 한강에 묻다-한강의 어제, 그리고 오늘] 물장구 치고 멱 감던 모래밭의 추억
입력 2010-05-27 21:40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정부는 강을 살리는 일이라고 하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은 “강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혼란스럽습니다.
무엇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들다는 분이 많습니다. 강바닥 퇴적물을 파헤쳐 꺼내고 강물을 막는 보를 설치하고…. 현장을 둘러보더라도 전문적 설명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번 And에서는 4대강 살리기 사업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먼저 한강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4대강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드립니다. 한강은 1980년대 준설과 보 설치를 통해 지금의 모습이 됐습니다. 과연 지금의 한강은 성공일까요, 실패일까요. 한강에서 4대강의 미래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업이 펼쳐지고 있는 4대강 현장도 소개합니다. 생태계와 문화재 파괴가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공사가 규정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했습니다. 공사장 주변 주민이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해 내는 목소리도 들어봤습니다. 4대강 사업의 적정성을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나이 든 서울 토박이의 기억 속 한강은 두 얼굴이다. 평상시 한강은 정겨운 놀이터였다. 언제든 찾아가 편하게 몸을 맡길 수 있는 곳. 강은 삶에서 가까웠다.
비가 올 때마다 한강은 무섭게 변했다. 넘쳐난 강물이 주택가로 흘러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동안 강에게 받은 혜택만큼 피해를 봐야 했다. 한강은 개발이 남겨 두고 간 온갖 쓰레기를 모아 담았다. 강이 점차 삶에서 멀어졌다. 서울 시민 머릿속에서 한강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백사장의 추억
“한강에 모래가 있었다는 거 모르죠?” 1960∼70년대 청년기를 서울에서 보낸 사람들은 젊은 세대가 모르는 사실 하나를 아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자영업을 하는 김충익(57)씨는 중학생 때인 60년대 후반 ‘백사장 결투’ 얘기를 들려줬다.
“친구들은 시비가 붙으면 ‘백사장으로 나와’라고 했어요. 그러면 학교에서 소문이 쫙 퍼지고 수업을 마치면 심판 볼 친구, 구경할 친구 다 포함해 열명쯤 따라 나가죠. 근데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져서 금방 지쳐버려요. 싸움은커녕 주먹만 허공에 날리다 승부를 보지 못한 적도 있어요.”
넘치는교회 담임목사인 조택기(63)씨는 70년대 초반 한강에서 몸을 그을린 얘기를 했다. “한강 주변에 가게도 없었어요. 광진교 근처에서는 그 다리만 보였죠. 한강 폭의 3분의 1 정도는 모래로 꽉 차 있었어요. 마치 해수욕장처럼 모래 위에 텐트를 치고 쉬다가 더우면 수영하러 한강에 들어갔죠. 웃옷을 입지 않고 모래 위에 누워 선탠도 하고요.”
서울 보광동에서 유년을 보낸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백사장이 아주 넓었다고 기억했다. “백사장이 길게 펼쳐진 곳은 강물에서 약 1㎞인 곳도 있었어요. 폭이 좁은 데가 500∼600m였어요. 강모래는 바닷모래와 다릅니다. 굉장히 곱고 은빛을 띤 은모래에요.”
1960년대 서울의 한강변 백사장은 약 800만㎡였다고 한다. 광나루와 양화나루터, 용산, 마포 부근에 백사장이 있었다. 지금 압구정도 온통 모래밭이었다.
백사장에서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김충익씨는 60년대 후반 10월 1일 국군의 날이면 개최된 에어쇼를 백사장에서 구경했다.
시국강연회나 민중궐기대회가 모래 위에서 개최됐다. 광복을 기념하는 잔치도 열렸다. 유명 목사의 대규모 설교와 부흥회 단골 장소도 백사장이었다. 큰 행사 때마다 수십만 인파가 백사장을 찾았다. 백사장은 지금의 서울광장처럼 광장 역할까지 해냈던 것이다.
“예전에는 한강 물을 그냥 마셨죠.”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가 전쟁 후 이룬 경제 성장을 빗댄 말이다. 직접적으로는 각종 오염물질에 찌들어 뿌옇던 한강이 오염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일을 뜻한다. 한강 물은 오래 전부터 더러웠던 것일까. 서울 토박이들은 60년대 후반까지 한강 물은 비교적 깨끗했다고 증언했다.
“내 눈에 비친 한강 물은 깨끗했어요. 장마철이 지나고 한두 달쯤 뒤인 8월에는 수영을 했습니다. 물이 깨끗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얕은 곳은 물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어요. 목이 마르면 손바닥으로 물을 떠 마셨습니다.”(김충익씨)
“한강 인도교 중간에 중지도라는 섬으로 수영을 하러 가곤 했습니다. (물이 빠지면) 중지도까지 남자 중학생 걸음으로 30분 걸렸는데, 그곳에 가면 이미 몇몇 아이들이 들어와 수영을 하고 있었어요.”(이기승·56·서울 개봉동)
한강에서는 민물장어가 많이 잡혔다. 광나루유원지에는 장어를 잡아 배에 탄 손님에게 바로 내놓는 놀잇배가 여러 척 있었다고 한다. 일반인도 강변에서 낚시를 했다. 조택기씨는 “어떤 사람은 원시 시대처럼 죽창을 갖고 다니면서 고기를 잡았다”고 했다.
한강에서 잡은 물고기는 곧바로 식탁에 올랐다. 신일남(69)씨는 “지금의 한강대교 남단 쪽에서 물고기를 잡아 어머니께 가져다드리면 음식을 만들어주셨다”고 회고했다.
겨울철 한강 물은 툭하면 얼었다. 나이든 서울 시민들은 강물이 깨끗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저 강이 20㎝씩 얼었던 강이에요. 살얼음 끼는 그런 강이 아닙니다. 1년에 2주일 정도는 강물이 얼어 나룻배가 다닐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걸어 다니고 차량을 실은 나룻배는 얼음을 깨면서 다녔죠.”(정병호 교수)
물난리의 악몽
인간이 물과 관계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물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치수(治水), 물을 마시고 씻는데 쓰는 이수(利水), 물과 주변 환경을 즐기는 친수(親水)다. 옛 사람들은 친수와 이수에는 성공했으나 치수에 실패했다. 서울 토박이들은 한강 물이 한번 불어나면 시내 곳곳으로 쳐들어왔다고 기억했다.
“비만 오면 서울에 물이 넘쳤어. 비가 아주 많이 온 것도 아닌데. 비만 왔다 하면 청량리까지 물이 막 들어오는 거야.”(조진수·83)
경향신문 69년 8월 2일자에 ‘악순환 수도(水都)-서울은 왜 비만 오면 잠기나’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강을 끼고 있는 성동구(암사동 등 6개) 서대문구(가좌동 등 3개) 영등포구(사당동 등 4개) 마포구(신정동 등 2개)의 도합 15개 지역이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기만 하면 온통 물바다가 되어버린다. 피해 주민만도 1400가구 6780명에 달하고 모두 864채의 집이 물에 잠기는 형편. 게다가 잠실동, 부리도, 풍납동, 난지도, 잠원동 등은 물이 불어나면 완전히 고립돼 815가구 4855명은 꼼짝없이 물에 갇히는 딱한 실정이다.”
기사는 침수 원인을 ‘강물 범람을 막을 수 있는 둑이 마련되지 않은 탓’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60대 이상 서울 시민은 1982년 시작돼 86년 준공된 한강종합개발 사업을 대체로 좋게 평가한다. 적어도 물난리의 끔찍함을 다시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일단 둑이 넘쳐 물이 불어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위기관리 측면에서는 (한강 개발을) 잘했다고 봅니다.”(김모씨·54·한남동)
날이 어둑해진 뒤 한강변은 좋은 기억을 남긴 장소가 아니었다. 건달과 취객이 돌아다녔고 싸움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택기씨는 “낮엔 한강변에서 자유롭게 놀았지만 밤에는 그곳에 거의 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한강에서는 가끔 정체불명의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
오염의 세월
물난리가 나면 강물이 더러워졌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다. 한강이 오염된 원인은 다른 것들이었다. 60년대와 70년대, 막 생겨난 서울 주변 공장은 당연한 듯 폐수를 한강으로 흘려보냈다.
합성세제가 환호성 속에 각 가정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제는 음식물 찌꺼기와 함께 강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그나마 연성(軟性)세제가 주로 쓰이지만 그때는 물에 잘 분해되지 않는 경성(硬性)세제가 대부분이었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최근 일간지 기고문에서 “비가 오면 댐의 수문을 열 듯 똥통 문을 열고 한강으로 통하는 개천으로 인분을 콸콸 쏟아버렸다”고 했다.
분뇨를 한강에 버리는 것은 당시 서울시의 정책이었다. 시는 69년 분뇨처리 계획을 세우면서 연간 분뇨 배출량 178만9500㎘ 가운데 34만㎘를 한강에 직접 버린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수세식 화장실을 통해 처리되는 양은 약 70만㎘뿐이었다. 나머지 약 74만㎘는 서울 근교 농촌 등지에 거름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는 게 시의 생각이었지만 농촌이 서울의 분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00만㎘ 이상의 분뇨가 한강에 방류됐다. 분뇨를 한강에 버리는 일은 80년대까지 계속됐다.
청계천을 타고 한강으로 흘러들어간 생활하수도 오염 원인 중 하나였다. 다음은 75년 시민 김영원씨가 신문 지면을 통해 당국에 호소한 글이다.
“제 3한강교에서 한번만이라도 강물을 내려다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흑색에 가까울 만큼 혼탁한 청계천 하수가 강심까지 뒤덮어 본류의 맑은 물과 경계를 이루며 곧바로 보광수원지 취수구로 서슴지 않고 흘러내려가고 있지 않습니까.”(동아일보 75년 3월 31일자)
한강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미래
한강의 더러움에 질색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 한강 모습에 만족해한다. “그 당시에는 재미가 있고 추억이 있지만 황무지였고 지저분했던 게 사실입니다. 지금은 도로변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문화시설도 만들어졌잖아요. 당연히 지금이 훨씬 낫죠.”(신일남씨)
반면 한강의 옛 모습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 “예전엔 옷 벗고 물에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접근을 못하게 됐어요. 강 따로 사람 따로가 된 것이지요. 해외 나가보면 유명한 강은 접근이 쉽습니다. 시민과 강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고요. 한강은 이제 더 이상 한강이 아닌 것 같습니다.”(고도환·64·서울 방배동)
서로 다른 기억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만들어낸다. 신·고씨 두 사람의 시각 차이는 한강을 보는 차이지만 강에 관한 가치관의 다름이기도 하다. 온갖 문명수단을 통해 강을 통제하고 정복할 것인가, 아니면 최대한 자연 그대로 강을 두면서 서로 호흡할 것인가의 차이다.
이 차이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둘러싼 논란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정부를 비롯해 사업을 추진하자는 사람들은 한강이 개발로 정돈됐듯 4대강도 그럴 것이라는 입장이다. 반대 측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시민의 삶에서 한강이 멀어진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믿는다.
정부는 이미 선택을 했다. 4대강 사업은 지난해 11월 착공,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정부 선택을 판단하는 기준은 각 개인에게 있다. 4대강은 지금의 한강과 비슷한 모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꿈꾸는 강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특별취재팀=임항 환경전문기자, 조국현 기자(이상 사회부) 권기석·김원철 기자(특집기획부), 김현길 기자(산업부)
사진=서울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