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동토의 포로’ 광복 후에도 고국 가족들과 기나긴 생이별
입력 2010-05-25 19:19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3부 강제동원 더 깊이 들여다보기
② 일본에 버림 받고 소련엔 강제 억류… 사할린
8일이 되자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졌다. 유즈노사할린스크 부근에서 유일하게 일제 탄광 흔적이 남아있다는 브이코프 지역을 찾아갔다. 브이코프의 일제 때 지명은 나이부치(內淵). 가와카미 탄광과 함께 남사할린의 손꼽히는 대형 탄광이었던 나이부치 탄광은 미쓰비시(三菱)광업주식회사 소유였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북쪽으로 45㎞쯤 달리자 일제 시기 제지업 중심 도시인 돌린스크가 나왔고, 여기서 다시 서북쪽으로 15㎞쯤 더 가니 시골의 탄광 마을이 나타났다. 나이부치 탄광은 종전 뒤 남사할린이 소련에 귀속되면서 브이코프 탄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5년 폐광됐는데, 중국인들이 사들여 2007년부터 다시 가동한다고 한다.
나이부치 탄광 광부들은 어디로
곳곳에 석탄이 야적된 잿빛 풍경이 을씨년스러웠다. 일제 때 지은 선탄장이 보였다. 벽면이 여기저기 부서져 내린 채로 서 있었다. 파낸 석탄을 컨베이어 벨트로 옮겨 쓸모없는 돌 등을 골라내던 시설이다. 탄광 내부로 들어가 조선인 광부들이 드나들던 갱구(坑口)의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어두컴컴한 굴 안의 벽면 나무판자 틈을 통해 자연광이 새들어와 겨우 주변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바닥에는 곧게 뻗은 두 쌍의 왕복 철로가 굴 안쪽 소실점까지 곧게 뻗어 있었다.
1500명에 달했던 조선인 광부들은 여기서 탄차를 타고 출발해 막장까지 4㎞, 지하로는 500m 깊이까지 들어가 하루 평균 3200t의 석탄을 생산했다. 노동 환경의 열악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심지어 도시락을 일찍 먹었다고 맞아 죽은 사례도 있었다.
“경북 칠곡군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어떤 아주바이(아저씨) 한 양반은 아들 대신 들어온 건데, 점심 일찍 먹었다가 죽었어요. 점심밥을 미리 묵어버리고 벤또(도시락)에 돌 이만한 거 하나 여놨지. 그러니까 (일본인 감독관) 젊은 사람이 ‘밥이 들었는가, 돌이 들었는가?’ 하며 흔들어봤단 말이에요. 떨거덕 떨거덕 돌멩이 소리지요. 그래 가지고 그 영감이 얻어맞아 죽었어요. 점심 묵으라 하니 제때 안 먹고 아침에 다 먹어버렸다꼬.”(정화자·85·1943년 동원된 남편 따라 브이코프에 거주)
조선인들 묻힌 공동묘지
탄광에서 15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하자 야산에 거대한 공동묘지가 펼쳐졌다. 러시아인을 비롯해 브이코프 일대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숨진 조선인들의 묘지도 이곳에 다수 존재하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징용자 묘지를 찾아 이렇다 할 길도 없는 산비탈을 힘겹게 올랐다. 5월인데도 온통 눈밭이어서 무릎 위까지 발이 쑥쑥 빠져 신발과 바지가 금세 젖었다.
울창한 자작나무숲 사이사이에 조선인 묘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조선인 묘는 우리식으로 불룩하게 봉분이 만들어져 있어 평평한 러시아인 묘와 차이를 보였다. 비문은 제각각이었다.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상방동 서경용 지묘, 탄생일 1919년 1월 14일, 사망일 1965년 7월 4일’이라고 본적지와 묘주, 생몰일시가 정확하게 기재된 비가 있는가 하면 이름만 겨우 적혀 있는 비도 있었다. 1917년 태어나 1972년 사망했다는 장재임의 묘비 앞에는 누가 갖다 놨는지 한국산 소주 한 병이 내용물이 들어있는 채 놓여 있었다.
이런 공동묘지가 남사할린 곳곳에 총 21개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부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사할린 징용자의 유골 확인 및 봉환에 소극적이어서 조선인 묘에 대한 실태파악은 기약이 없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지나 사할린 중앙부의 최남단, 즉 닭발 모양으로 생긴 남해안의 중앙부에 코르사코프 항구가 있다. 이곳의 일제 시절 명칭은 오도마리(大泊)였다. ‘크게 배를 대는 곳’이라는 뜻처럼 남사할린에서 가장 큰 항구다. 일제 때 조선인 노무자들이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배를 타고 맨 먼저 도착하던 곳이다. 노무자들은 여기서 다시 기차에 실려 사할린 곳곳의 작업장에 빨려 들어갔다.
오호츠크해의 불모의 섬이었던 사할린은 본래 제정 러시아 차르 정부에 의해 노예형을 선고받은 가장 위험한 범죄자들이 가는 유형지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사할린 섬 중에서 북위 50도 이남의 땅 3만6090㎢를 양도받아 개발에 착수했다. 특히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내리면서 남사할린의 30여개 탄광과 수많은 벌목장, 비행장, 도로 및 철도 건설 공사장에 조선인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병참기지화했다.
남사할린에 조선인이 얼마나 동원됐는지는 통계마다 엇갈린다. 1945년 종전 당시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의 수는 2만5000∼4만3000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인의 경우는 종전 당시 약 3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일본 정부가 소련과 협정을 맺으면서 1950년대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해 거의 전원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본 국적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나 몰라라 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행태의 가장 비열한 경우였다.
‘망향의 언덕’ 눈물짓던 이들
조선인들은 일본에 의해 버려진 뒤 다시 소련 측에 붙들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남사할린을 장악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막대한 희생자를 낸 상황이라 전후 재건을 위한 노동력이 절실하다는 이유 등으로 조선인들을 억류했다. 이후 조선인들은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압박 속에 고향 땅을 밟을 희망을 잃고 소련 국적을 취득했으며, 일부는 삶을 포기하거나 북한행을 택하기도 했다.
코르사코프 항구 뒤편의 지대가 높은 도로 변에는 항구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망향의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 역사 및 사할린 문제 전문가로 취재팀과 동행한 한국외국어대 방일권(43) 교수는 이곳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을 이렇게 전했다.
“광복이 되자 사할린 도처에 있던 조선인들이 여기 망향의 언덕에 와서 매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가 들어오는지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몇 달을 기다리면서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항구에서 하역 날품팔이 일을 하기도 했지요. 결국 귀환할 희망이 없으니까 그냥 이 근처에 정착을 한 사람도 있고, 일부는 폐인이 되거나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들어와서 눈물 흘리고, 못 나가서 눈물 흘리던, 그런 수많은 한(恨)이 맺힌 지점이 코르사코프 항구와 망향의 언덕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1Q84’에서 설정된 다마루의 부모는 이렇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할린 징용자 수만명의 한 전형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이미 수백만부가 팔린 책. 독자들이 다시 들춰본다면 이 대목을 한번 음미해 보는 게 어떨까. 일본 독자들에게는 무리일까.
“참 너무한 얘기지. 배려라는 게 전혀 없잖아.”
브이코프·돌린스크·코르사코프(사할린)=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