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천신만고 끝 56년만에 고향 가보니 호적엔 사망 처리”

입력 2010-05-25 22:14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3부 강제동원 더 깊이 들여다보기

② 사할린, 日에 버림 받고 蘇엔 억류된 징용자들


“사할린 남부는 일본 영토가 되어서 당시 가라후토라고 불렸지만, 1945년 여름에 소비에트 군이 점령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포로로 잡혔어. 아버지가 항만시설에서 일했던 모양이야. 일본 민간인 포로 대부분은 그 얼마 뒤에 일본으로 송환되었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노동자로 그쪽에 송출된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았어. 일본 정부가 그 거래를 거부했거든. 종전(終戰)과 함께 한반도 출신자는 더 이상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참 너무한 얘기지. 배려라는 게 전혀 없잖아.”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셀러 소설 ‘1Q84’에 나오는 대목이다. 냉철한 보디가드 다마루가 여주인공 아오마메에게 자신이 젖먹이 때 조선인 부모와 헤어지게 된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기행문 ‘사할린섬’이 주요 소재로 다뤄지는 등 사할린이 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하루키는 특히 한인2세 다마루의 술회를 통해 사할린에 징용된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이용당하다 어떻게 철저히 버림받았는지를 압축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일본 전후세대가 자국의 ‘국민작가’가 제시한 이 대목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Q84’에 열광한 한국의 젊은 독자들 역시 조선인 징용자 및 그 가족들이 강제노역과 이산의 아픔 속에서 얼마나 신음했는지 헤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70년 안쪽의 역사이지만 이미 망각의 지층 속에 깊이 파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사할린 강제동원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러시아의 땅 끝’을 찾아간 것은 지난 6일이다.

김윤덕 할아버지 이야기

징용 1세대의 또 다른 아픔

이날 저녁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다음날에도 그칠 줄 몰랐다. 취재팀은 러시아 사할린주의 주도(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숙소에서 7일 아침 자동차로 출발해 웅덩이와 진흙탕 투성이 도로를 달렸다. 북서쪽 방향으로 1시간쯤 가자 옛 탄광도시인 시네고르스크가 나타났다. 시네고르스크는 일제가 사할린을 점령했을 당시 명칭이 가와카미(川上)였다. 남사할린 최대 탄광 중 하나로 꼽히던 가와카미 탄광은 일본 최대 재벌 미쓰이(三井)의 계열사 미쓰이광산주식회사 산하에 있었다. 1945년 8월 종전 이후 시네고르스크 탄광으로 명칭이 바뀌어 러시아 정부가 운영하다 2004년 폐광했다.

이곳에서 만난 징용 1세대 김윤덕(85) 할아버지는 본래 경북 경산군 하양면 남하리에서 가족과 함께 논 서 마지기, 밭 서 마지기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 불과 18세이던 1943년 12월 11일 사할린으로 동원됐다.

“우리 면에서 47명이 같이 출발했어요. 다나카라는 사람이 인솔해서 시모노세키, 홋카이도를 거쳐 12월 17일 밤 10시쯤 가와카미에 떨어졌지요. 전부 눈에 쌓여 하얘가지고 뭐가 뭔지 모르겠더군요. 고향에서는 눈이 거의 안 오고, 와도 저녁에 조금 내렸다 낮에는 다 녹았는데. 조선인 기숙사의 다다미 방 바닥에서 그냥 웅크리고 잤어요. 중간에 스토브가 하나 놓여 있었지만 너무 추웠지요. 다치기도 많이들 다쳤어요. 나도 탄광에서 합빠(다이너마이트로 탄층을 폭파시켜 캐기 좋도록 하는 ‘발파’의 일본식 발음)를 놓다가 갱이 무너져 깔리는 바람에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어요. 일본 사람들이 고무호스 같은 걸로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 맞으면 대번에 몸에 줄이 좍좍 납니다.”

탄광에서의 고생은 일본 본토의 조선인 광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씨와 같은 사할린 징용자들에게 닥친 결정적인 아픔은 따로 있다. 광복 후 옛 소련 당국에 의한 억류와 그로 인한 가족과의 기나긴 이별이다.

“전에는 여기에 일본 사람하고 조선 사람밖에 없었는데, 해방되고 사흘 만에, 그러니까 1945년 8월 18일에 소련 군인들이 들어왔어요. 처음 보니까 나이도 몇 살 안 먹었는데 참말로 털이 노랗게 나고 눈은 고양이 눈처럼 새파래가지고…. 탄광에 있던 일본 사람들은 소련 밑에서 그냥 그대로 일하다 1953년부터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왜놈들이 원래는 조선 사람부터 먼저 고향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저희만 먼저 살짝살짝 갔어요. 그런데 우리는 소련이 안 보내줘요. 보내달라고 암만 해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허락을 해줘야지? 그래서 여기서 고생고생하다 나중에 북조선 간 사람도 많습니다.”



사할린선 산 목숨, 한국선 죽은 목숨

김씨는 다른 데 가면 죽을까 싶어 줄곧 시네고르스크에서 살았다. 탄광에서 만난 대구 동촌 출신 사람의 딸을 소개받아 1950년 결혼도 했다. 탄광 노동자로 계속 일하다 고국에 돌아갈 희망으로 오랫동안 ‘무국적자’로 살았지만 1988년에 이르러 할 수 없이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 “소련에서 살려면 소련 국적을 받아야지요. 안 그러면 어디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해요. 처음에는 고향 가려고 소련 국적을 안 받았는데, 못 가니까 다들 받았습니다.”

김씨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체구에 기력이 놀랄 만큼 정정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나는 죽은 사람”이라고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일까. 김씨가 천신만고 끝에 꿈에 그리던 고향에 와보니 자신은 호적에 ‘사망’으로 처리돼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98년 사할린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해서 고향에 있는 어머니하고 동생들을 찾게 됐어요. 그래서 다음해 어렵사리 한국을 방문해 경산 정류장에 내렸더니 동생들하고 조카들이 전부 나와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셔서 장남인 나를 붙들고 울고. 우리가 5형제인데 내가 없는 동안에 1명은 아파서 죽고, 1명은 베트남전쟁 가서 죽었다고 합디다. 그런데 한 동생이 ‘형님도 죽은 걸로 돼 있다’고 그래. 나중에 호적등본을 떼 봤더니 ‘사망’으로 돼 있어요. 해방 뒤에도 내가 소식이 없어서 부모님이 죽은 걸로 신고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걸로 호적을 고치려고 대구시를 두 번이나 찾아갔는데 ‘너무 오래돼서 못한다’고 합디다.”

한국에 영주귀국할 생각은 없는 걸까. 1992년부터 대한적십자사가 주도한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통해 3000명에 달하는 1세대(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 출생자만 해당)가 경기도 안산 고향마을 등지에 정착해 살고 있다. 그러나 영주귀국을 끝내 거부하는 1세대도 일부 있다. 김씨가 거기에 해당한다.

“자식들 여기 놔두고 우리 부부 둘만 가면 노인들끼리 가만히 죽으러 가는 것밖에 안 되지요. 취미 없습니다. 아들 하나, 딸 둘을 뒀어요. 여기 있으면 어쩌다 한번씩 자식 손주들 모여서 놀기도 하고. 그냥 여기서 사는 게 더 좋아요.”

김씨는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겪을까봐 모국에 안주하지 못한다. 일제 강제동원의 후유증은 아직도 이렇게 짙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네고르스크(사할린)=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