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한국 화두는 ‘전쟁’…靑은 뒤늦게 진화 부심
입력 2010-05-25 23:39
2010년 5월 25일 시민들은 사무실에서, 저녁자리에서, 거실에서 ‘전쟁’을 화두에 올렸다. 대부분은 “이러다 전쟁 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가 “설마”하고 자답했다. ‘북괴’에서 ‘북한’으로 전환된 뒤 30여년의 평화가 가져다준 낙관적인 결론이었다. 2002년 6월 제2차 연평해전 때도,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때도 국민들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낙관만 하기엔 이명박 대통령과 군의 대응이 단호하고, 북한의 반발도 수사(修辭)로 보기엔 매우 자극적이다. 천안함 사태가 벌어진 지 두달째인 25일 서울은 전쟁의 불안과 평화의 낙관이 교차하는 혼란 속에 빠져 있는 풍경이다.
다행히 ‘라면 사재기’가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생필품 판매량이 급증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한반도 긴장 고조와 유럽발 경제위기가 겹치면서 원화 약세를 예상한 ‘달러 사재기’가 시작됐다는 소문이 나돈 정도의 술렁거림은 있다. 두 아들을 유학 보내는 한의원 원장 김양규(55)씨는 “북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아들들이 유학 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 불안하다”고 말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고가혜(23·여)씨는 “전쟁이 날까봐 불안하지는 않지만 북한과의 대치 상황이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결국 취업문을 더 좁히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해상 봉쇄는 모순된 상황의 상징물이다. 군은 제주해협에 진입하는 북한 상선 차단을 위해 한국형 구축함 문무대왕함(KDX-Ⅱ·4500t급)을 투입했다. 문무대왕함은 지난해 5월 아덴만에서 해적선에 나포될 뻔했던 북한 상선 ‘다박솔호’를 구조했던 군함이다. 1년 전 북한 상선을 구조했던 군함이 다시 북한 상선 차단에 투입됐다. 이날 북한 상선은 제주해협을 통과하지 못했고, 남한 비행기는 북한 영공을 우회했다. 서울에서 워싱턴까지 1시간이 더 걸린다.
이 대통령은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현승종 전 국무총리, 김수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 국민원로회의 51명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이 대통령은 “나의 궁극적 목표는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니고 이 위기를 극복해 잘잘못을 밝혀놓고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라며 “북한이 위협하고 있지만 우리가 분명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만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전 기관에 전투태세 돌입을 명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 학술단체인 ‘NK지식인연대’는 “오극렬 북한 국방위 부위원장이 20일 오후 7시쯤 자체 방송망을 통한 담화문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전군, 인민보안부, 국가보위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에 만반의 전투태세에 돌입하라고 명령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한반도 주변 열강의 움직임도 긴박했다. 미국과 중국은 이날 베이징에서 제2차 전략경제대화 이틀째 회의를 열어 천안함 문제를 다뤘다. 중국의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사무 특별대표는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유명환 장관을 만나 천안함 문제를 논의했다.
한반도 전쟁의 키를 쥔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위기 확대를 바라지 않는 듯하다. 필립 크롤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정례 브리핑에서 “우리가 취할 조치들의 목적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고, 중국 장위(姜瑜) 외교부 대변인은 “우리는 시종일관 대결보다는 대화가, 긴장보다는 화해가 낫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국지전 가능성과 관련, “국제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북한이 제2의 도발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이전 사례를 보면 북한이 추가 도발한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남과 북이 ‘단호한 대응’과 ‘무자비한 징벌’로 대립 수위를 높여가고 있지만 청와대는 이날 전쟁을 얘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국민 불안감 극복’이 논의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위기감이 너무 강조됐다. 국민의 불안감을 자극할 수 있는 표현들은 자제돼야 한다는 내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안보’에서 ‘경제’로 이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남도영 기자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