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문학으로 본 전쟁과 기억] 릴레이 인터뷰 ② 소설가 이호철
입력 2010-05-25 17:28
“부산 피난 일기가 내 소설의 뿌리”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인 실향민 소설가 이호철(78)은 6·25전쟁과 민족분단의 비극, 이산가족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뤄온 분단문학 작가군의 중심에 서 있다. 가족을 두고 고향을 떠나온 실향의 아픔, 전쟁 및 분단으로 뒤틀린 동시대인들의 삶은 그의 문학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지난 18일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이호철 작가를 만났다. 하얀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그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목소리에 기운이 넘쳐 흘렀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인데 6·25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6·25가 터졌을 때 원산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어요. 그해 7월 인민군에 동원됐고 10월에 강원도 양양에서 포로가 됐죠, 북진하는 군을 따라 북으로 호송되다 천행으로 풀려나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해 12월 9일 다시 혼자 남으로 내려왔어요.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원자폭탄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해 무작정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었죠. 사람들이 온통 원산 선창가로 모여들었고 그 틈에 끼어 미군 LSD(상륙수송선)에 몸을 실어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일주일이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네요.”
그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고향을 뜨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일본에서 나온 문고판 에세이집 한 권을 몸에 지니고 나올 정도로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막심 고리키가 톨스토이, 체호프, 안드레예프 등 3명의 러시아 문호에 대한 추억을 정리한 ‘3인의 추억’이란 책이었죠. 고등학교 3학년 때 교내 문학서클 책임자였는데 많은 책을 읽었어요. 러시아 소설에 특히 관심이 많았지요. ‘광장’을 쓴 최인훈이 2년 후배였어요.”
-전쟁 때 비극적인 상황을 숱하게 겪었을 텐데.
“인민군에 동원되고 바로 우리 부대는 원산 신풍리 뒷산 골짜기에 호를 파고 잠복해 있었어요. 미군이 어떻게 알았는지 대대적인 공격을 해 왔지요.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는데 미군 폭격기들이 커다란 폭탄을 퍼부어 댔죠. 폭탄이 호에 정통으로 떨어져 수십 명이 처참하게 떼죽음을 당하는 걸 바로 눈 앞에서 목격했지요. 전투기 기총소사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도 봤고요.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었던 거죠.”
-그런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극한 상황이다보니 매 순간마다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골몰했지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생각해 봐야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완전히 무심(無心)의 상태로 지낸 거죠.”
-부산에서의 피난 생활은.
“부두 노동자, 제면소(국수 만드는 곳) 직공, 미군부대 경비원 등으로 일했죠. 그러면서 글을 썼어요. 51년 남포동 금강다방으로 황순원 선생을 찾아가 제가 쓴 작품을 보여주기도 했었죠. 부산 피난생활을 일기로도 기록했는데 당시 경험은 이후 내 소설의 밑바탕이 됐지요.”
그는 52년 겨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지금의 숙명여대 뒤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했는데 종전(終戰) 얘기가 나오던 때였는데도 밤마다 파주 쪽에서는 총 소리, 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전투기가 서울 상공까지 날아온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6·25는 우리 민족에게 어떤 사건이었나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죠. 우리 5000년 역사에 그런 비극이 다시 없어요. 사람들이 광기(狂氣)에 사로잡혔던 때였던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 대립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그런 운명같은 사건이었죠.”
그는 6·25가 자신은 물론 동시대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내 삶을 가장 결정적으로 좌우한 것은 월남(越南)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얼마 전 원산동창회 모임에서 누가 묻길래 그렇게 대답했더니 모두들 내 의견에 맞장구를 치더라고요. 6·25 때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죠. 가족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요행이기도 했어요. 이북에 있었다면 문학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거예요.”
-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될 당시 심정은.
“정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저는 전쟁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집에 가기는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찹했지요.”
그가 고향을 홀로 떠나올 때 원산에는 할아버지와 부모, 누나 둘,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중국 옌볜 쪽을 통해 가족들을 찾았을 땐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상을 뜬 뒤였다.
-실향민이기 때문에 통일에 대한 마음이 간절했을 텐데.
“남북적십자회담 등 남북한 만남이 있을 때면 신문에 그런 심경을 담은 칼럼도 많이 썼죠. 2000년 8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평양에서 누이동생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요. 전쟁과 분단, 통일을 빼고는 내 문학을 얘기할 수 없어요. 내 문학은 탈향에서 귀향으로 가는 여정인 셈이죠.”
하지만 그는 “이제 지쳤다”고 했다. 일주일이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귀향의 길이 너무나도 길어졌고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분단 극복의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했지만 아직까지도 해결의 실마리가 안보이니 사실 맥이 빠지기도 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통일에 관심이 없는 게 안타깝지요. 남북한이 갈리기 전에는 열차 표만 사면 부산서 회령까지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죠.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았었는데 분단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이제 북한 사람들을 달나라 사람으로 취급할 정도가 돼 버렸어요.”
-통일은 어떻게 이뤄야 하나요.
“나는 통일이라는 말이 싫어요. 너무 무겁거든요.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통일은 일단 놔 둬야 해요. 남북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게 중요해요.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한솥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면 통일은 물이 차오르듯이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겠어요?”
작가는 ‘한살림 통일론’으로 불리는 자신의 통일관과는 달리 최근 남북교류가 전면 중단의 위기에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해 “걱정스럽다”며 안타까워했다. 북한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