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문학으로 본 전쟁과 기억] 이호철의 작품세계는… 스무살 무렵 전쟁의 상흔 녹여내
입력 2010-05-25 21:29
소설가 이호철의 작품세계는 6·25전쟁과 민족분단 문제를 씨줄로, 귀향과 통일의 염원을 날줄로 삼아 짜여졌다. 스무살 남짓 그 어름에 겪은 전쟁의 기억과 상처는 이후 그의 문학의 토대였다.
전쟁이 휩쓸고 간 1950년대에 발표한 단편들은 전쟁의 상흔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55년 ‘문학예술’에 황순원 추천으로 발표된 등단작 ‘탈향(脫鄕)’은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그렸다. 이북의 한 마을에 살던 광석, 두찬, 나, 하원 등 4명의 청소년과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피난민을 실은 배 안에서 우연히 만나 부산이란 타향에 내던져진 이들은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서로를 의지한다. 화물기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고달픈 생활에도 좋은 반찬은 양보하고 고향에 함께 돌아갈 날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사교성이 좋아 피난 생활에 잘 적응하는 광석과 그렇지 못한 두찬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이 와중에 광석이 기차에 치여 숨을 거둔다. 광석이 죽어가는 걸 보고도 외면했던 두찬은 죄책감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향을 떠올리며 눈물만 짜는 어린 하원이 귀찮아져 나는 그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뿌리 뽑힌 실향민의 비애를 그렸지만 이 작품은 전후에 쏟아졌던 ‘귀향소설’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날을 꿈꾸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가려는 실향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목에 작가의 그런 의도가 깔려 있는 셈이다.
56년에 발표된 ‘나상(裸像)’은 군인이 된 형제가 각자 포로가 돼 끌려가다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되는 이야기다. 형은 약간 모자라 남들의 비웃음을 사지만 경비병에게 어렵게 얻은 밥덩이를 감춰뒀다가 동생과 나눠 먹는 형제애를 보여준다. 형은 다리를 절게 되고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상태에서 경비경의 총격에 목숨을 잃는다. 죽음을 예감한 듯 형은 전날밤 동생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무슨 일이 생겨두 날 형이라고 글지 말라. 울지두 말구 모르는 체만해. 꼭.”
이어 발표한 ‘소묘’ ‘파열구’ ‘빈 골짜기’ 등도 전쟁의 비극을 감각적이고 섬세한 필치로 담아낸 작품들이다. 작가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어느 쪽에도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전쟁은 그곳에 휩쓸린 이들의 책임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래서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라는 시선이 깔려 있다. 인민군에 동원됐다가 포로가 되고, 원산에서 풀려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연작 장편 ‘남녘사람 북녁사람’에서 포로인 ‘나’를 심문하던 국군 헌병을 묘사하는 대목에 이런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같은 민족끼리, 조선 사람끼리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짓들인지….”
라동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