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16) 치욕의 무령왕릉 발굴사
입력 2010-05-23 17:39
1971년 7월 8일 오후 4시30분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제 제25대 임금인 무령왕(462∼523)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김원용 박사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답니다. 삼국시대 왕의 무덤 가운데 주인이 밝혀진 것은 처음인데다 국보급 유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조사단은 밤새도록 유물을 수습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치욕의 발굴사를 남기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국보 163호), 무덤을 지키는 동물 진묘수(鎭墓獸·국보 162호),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금제 관장식(冠裝飾·국보 154-155호), 금은제 장신구, 구슬, 청동기물 등 4600여점의 유물을 단 이틀 만에 수습한 졸속 발굴이었죠.
백제 웅진 도읍시대 왕과 왕족 무덤 7기가 밀집해 있는 송산리 고분 중에서 무령왕릉(7호분)은 발굴 전까지 무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므로 다행히 도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물이 아무것도 없는 다른 왕릉을 정비하다 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물줄기를 따라 갔더니 한국 발굴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획기적인 고분이 나왔다는 것이죠.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의 화려한 금속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으며, 중국산 도자기와 한나라 때의 동전인 오수전(五銖錢),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등은 당시 백제의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아치형 석실 내 등감(燈龕·등자리)에 등불을 켜놓고 밀봉함으로써 무덤 안을 무산소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장품들이 부식되는 것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발굴 2년 후 발간된 보고서는 중요 유물을 중심으로 정리돼 출토품에 대한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발굴조사 후 활발히 진행된 무령왕릉과 그 출토품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요. 훗날 김원룡 박사는 “여론에 밀려 이틀 만에 발굴을 끝낸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수치였다”고 대국민 사과를 하기도 했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40년 만에 ‘무령왕릉 신보고서 Ⅰ-분묘’ 편을 최근 발간했습니다. 분묘와 관련된 미공개 발굴조사 사진 자료와 새롭게 제작한 실측도면, 3D스캔데이터를 활용한 발굴조사 보고서랍니다. 보고서에 수록된 300여장의 사진 중 일제강점기에 찍은 송산리 고분 유리건판 사진과 1991년과 2009년 내부조사를 위해 촬영한 사진 등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죠.
발굴에는 정치적인 입김도 작용하고 경제적인 이권도 개입되고 사회적인 여론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4대강 살리기 공사에서도 문화재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문화재청은 유물이 출토될 경우 보존을 원칙으로 한다는 방침입니다. 다만 한가지 무령왕릉 발굴에서 보듯 어떠한 이유로도 졸속 발굴은 용납될 수 없을 겁니다.
문화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