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16) ‘공장 고추장 섞어 판다’ 소문에 맘고생
입력 2010-05-23 19:48
“은영이 엄마, 시방 큰일 났다믄서?” “큰일이라니? 무슨 일 말이당가?” “은영이네 고추장이 뭐 잘못된 게 들켜서 난리가 났다고들 쑤군쑤군 하든데? 암시랑도 안 헌거여?”
순창의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에는 30곳이 넘는 고추장집이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다. 막연하게 ‘순창 고추장’을 사려고 온 손님들은 그저 외관과 주변 입소문에 의지해 가게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 번 ‘저 집은 못 믿을 집’이라고 소문이 난다면 여간해서는 만회하기 어렵다.
그런데 중소 규모 고추장집 중에서는 짱짱하다고 소문나 있던 우리가 소문에 휘말렸다. 인근 다른 집이 싸구려 공장 고추장을 섞어 팔다 발각된 것이 어찌 됐는지 우리 일로 알려진 것이다. 그 고추장이 납품되던 곳에는 “어느 집 고추장이냐?”는 문의 전화가 연달아 걸려왔다고도 했다.
“아이고, 억울혀서 못 살겄네. 버선 속이라 뒤집어 보여 줄 수도 없고. 이걸 우짠다냐.” “엄마, 그냥 진짜로 걸린 집은 저그 저 집이라고 밝혀버리믄 안 되겄는가. 아예 가게 앞에 커다랗게 써 붙여 버립시다.”
아닌 게 아니라 딱 그렇게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 집 앞에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어디 양자대면 혀서 누가 고추장에 몹쓸 짓 혔는가 속 시원하게 밝혀 보드랑게!” 하고 소리치고도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설 집사’여서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내가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첫째로 하나님 은혜이고, 둘째로 ‘아무래도 믿는 사람이 파는 고추장이 확실하겠지’ 하고 찾아와 주는 기독교인 손님들 덕이었다. 때문에 내가 교인인 것을 인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난장을 피워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인상을 준다면 고추장에다 몹쓸 짓을 했다는 누명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물론 정직하게 고추장을 만들어 왔다는 명예만은 반드시 회복하고 싶었다. 방법이 없어 끙끙 앓다시피 할 때 한 손님이 찾아왔다. “여그가 설 집사님이 하시는 가게지요?” 하고 운을 떼고는 뭔가 차마 말을 못 꺼내는 기색이었다. 말하나마나 “기독교인이람서 소문맨키로 속여 파는 건 아니겄지요?” 하고 묻고 싶을 것이었다.
“맞아요. 나가 설동순 집사여요. 즈이 집 고추장은 딴 거는 없고요. 지가 맨들고 싶은 대로 만든당게요.”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는 손님에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지는요. 낭중에 우리 예수님이 재림해서 이 땅에 오신다 하믄요, 우리 집으로 꼭 모시고 싶구먼요. 누추한 집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체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더 귀하게 여겨주신 게요. 오시면 딴 건 없고, 우리 집 고추장 푹 떠서, 순창에서 나는 질로다 맛난 야채랑, 순창 쌀로다 반지르르하게 지은 밥이랑, 맛깔나게 비벼서 한 그릇 대접하는 게 지 꿈이여요. 그런 마음으로다가 고추장 만드는 것뿐이랑게요.”
그 손님은 두 말도 안 하고 고추장을 한 단지 사가지고 갔다. 그 손님을 배웅하는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고 뭔가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그 뒤로 얼마 안 가 누명은 싹 잊혀졌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설 집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추장을 사갔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