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은 휴전선을 넘나들었다… 사전 만든 ‘1세대 장인들’의 회고
입력 2010-05-20 17:50
지난 1월 사전업계 3위 금성출판사가 사전편찬팀을 없앴다. 1984년 사전 시장에 뛰어든 지 26년 만이다. 사전업계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두산동아는 지난해 1월 사전제작팀을 본사에서 분리시켰다. 이제 사전팀이 남은 곳은 민중서림이 유일하다. 출판등록 1호 국어사전인 민중서림 ‘이희승 국어대사전’도 1994년 이후 개정증보판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사전은 책이지만 ‘쓴다’고 하지 않는다. ‘편찬(編纂·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 책을 만듦)’하는 것이다. 자료 수집이 작업의 고갱이여서 그렇다. 민중서림에서 31년째 사전 편집을 맡고 있는 윤차현(73) 상무는 “사전은 지식 갖고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기술이고, 그래서 숙달된 편찬자를 ‘장인(匠人)’이라 부른다.
낱말 뜻이 궁금하면 네이버를 찾아가는 시대. 얄팍한 종이에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찬찬히 풀어주던 기술이 사라져 가는 즈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김양진 연구교수와 한양대 국문과 오새내 강사는 지난 3월부터 국사편찬위원회 지원을 받아 ‘1세대 국어사전 장인’ 5명의 구술 증언을 기록했다.
서덕수(78) 전 동아출판사(두산동아의 전신) 출판부장, 윤차현 상무, 조재수(69)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장, 남영신(62)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안상순(55) 전 금성출판사 사전팀장. MBC 라디오 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구전민요 채록하듯 김 교수 등 젊은 국어학자들이 이들 편찬 전문가의 증언을 담아 온 구술집에는 초창기 사전 편찬의 악전고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국어운동하는 놈들은…
“(법학) 공부는 전부 한자로 하게 돼 있는데, 그걸(한자를) 쓰지 말자 어쩌자 하니까 선생들이 대단히 싫어한 것 같아요. 우리가 (국어운동 모임 만들어서) 지도교수 모실 때 하겠다는 분이 없었어요.”
고유어 중심의 ‘한플러스 국어대사전’(성안당)을 편찬한 남영신 회장은 우리말에 관심 많던 서울대 법학도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1970년대 대학가는 국어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경제원론 교수님이 ‘한글로 답안지 쓰면 학점 줄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시험 답안은 제가 한자로 썼는데, 경제원론은 정말 완벽하게 한글 전용을 했죠. 학점은 뭐 그럭저럭 줬더라고(웃음).”
남 회장은 10년쯤 뒤 한 신문에서 그 교수의 시론을 읽었다. “한글 전용을 하는 사람들은 성격이 개떡이고, 장래가 좋지 않다는 뉘앙스인 거예요. 화가 잔뜩 났죠.” 남 회장은 이 글을 읽고 국어사전 만들기에 더 매달리게 됐다고 말했다.
초창기 국어사전 편찬자들이 모두 ‘국어쟁이’는 아니었다. 1985년부터 지난 1월까지 25년간 금성출판사 국어사전을 만들어온 안상순 전 사전팀장은 “교육대학에서 국어학을 배웠지만 사전 만들려니까 너무 아는 게 없더라. 의미론 형태론 문법론 통사론 같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윤차현 상무도 비슷한 경우다. “그때는 출판사가 신문에 구인광고만 내면 구름 같이 사람이 몰려들었어요. (국어에) 뜻이 있다기보다 그냥 직장이 필요했던 거지. 난 원래 영어참고서 원고를 썼는데, 교정 같은 국어사전 일도 하다보니 자연스레 편찬자가 됐죠.”
창조의 어머니, 모방
1960∼70년대 출판계에서 사전은 돈이 됐다. “국어사전이 속된 말로 큰 재미를 본 모양이에요. 출판사가 영어사전 같은 다른 사전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출판업이 처음 생긴 때였으니까.” 윤차현 상무는 책이 귀한 시절이어서 국어사전도 백과사전식으로 꾸민 게 가장 인기였다고 기억한다.
“10여권씩 되는 백과사전은 부담스럽잖아. (민중서림) ‘국어대사전’ 이거는 한 권 가지면 사람 이름뿐 아니라 ‘이거 뭐더라’ 하고 뒤지면 행정구역까지 나와요. 엄격한 의미로 국어사전의 범위를 넘어섰지만 이것저것 궁금증 해결하는 데 그 이상 좋은 책이 없었어요. ‘너희들이 사전을 다 버려 놨다. 순수한 국어사전이 아니다’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문제는 자료였다. 사전 출판은 활발해도 편찬에 참고할 서적이 적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같은 말을 쓰는 나라, 북한의 유혹을 편찬자들은 떨쳐버리지 못했다. 냉전을 뚫고 국어사전은 휴전선을 넘나들었다. 북쪽 사전을 남쪽이 참고하고, 남쪽 사전을 북쪽이 개정판에 반영하는 식이었다.
“60년부터 62년까지 여섯 권으로 나온 (북한) ‘조선말사전’… 일본의 한 서점이 그 여섯 권을 단권으로 만들었습디다. 어딘가에서 그걸 입수한 분이 한글학회에 있었어요.” 1978년 한글학회에 들어가 1991년 ‘우리말큰사전’이 나올 때까지 사전 업무를 담당한 조재수 위원장 증언이다.
그는 “당시 많이 팔렸던 한 사전은 북한 사전을 상당 부분 베낀 거예요. 우리는 딱 보면 다 알았지. 하지만 당시는 그런 걸 발표할 수가 없었어요”라고 했다.
북한 사전은 고유어 뜻풀이가 상세했다. 의성어 의태어 설명도 남한 사전보다 꼼꼼했다. 일부 학자는 사전은 북한이 남한보다 앞섰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간행물 보는 게 큰일 날 일이던 때여서 (북한 사전 구하면) 표지 다 떼어내고… 하하. (출판사) 사장님이 일본에서 구해 오셨어요.”(안상순)
구술 증언을 기록한 김양진 교수는 “북한 사전을 참고했다는 증언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어서 학술적 검증이 필요하다”며 “북한 ‘조선말사전’도 1957년 남한에서 간행된 사전을 참고했다. 상호 보완적 관계였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북한 사전과 일본 자료 베껴
외국어와 전문용어 뜻풀이에는 주로 일본 자료가 동원됐다. “영어 자료는 뜻은 알아도 발음을 정확히 모르니까… 손 벌릴 데가 일본밖에 없잖아요. 저작권은 생각도 안 하고 베꼈지. 일본 사람들도 (우리가 베끼는 걸) 다 알았다더군. 근데 문제 삼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윤차현)
단어의 실제 쓰임새를 모아둔 자료도 없었다. 뒤져야 했다. “단어 용례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먼저 뜻풀이를 하고 (그 뜻에 맞는) 용례 찾으러 다닌 거예요. 대학생들 동원해서 한국문학전집 풀어놓고 문맥 의존도가 크지 않은 문장들, 잘라냈을 때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유형의 예문을 다 찾아내도록 해가지고 한국 문학 전체를 한번 쫙 뽑아내는 작업을 했어요.”(안상순)
자료가 부족해 사전에 실을 어휘를 늘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이 고민을 앞장 서 해결한 곳이 민중서림이다. 초창기 24만∼25만개였던 민중서림 국어사전 표제어는 1982년 42만개로 급증했다. 여러 노하우가 동원됐다.
“전문어 사전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걸 (출판 전에) 빼내왔어요. ‘국어사전 만드는 데 좀 씁시다’ 이렇게 부탁하면서.”(윤차현) 사전이란 사전은 모두 참조했다. 의학·선박·음악·국사·국악·기독교·건축·체육·지명·정치 사전과 동식물 편람까지 표제어 늘리기에 동원됐다.
이때도 가장 많이 활용한 건 일본 자료였다. 윤차현 상무는 “(한글로 된) 동식물 자료가 빈약해서 일본 책을 볼 수밖에 없었어요. 일본 책 번역한 게 있지만 너무 (설명) 양이 적어서 일본어로 된 책을 갖다 놓고 그림 보면서 이해하고 그랬죠”라고 했다.
사전이 인기를 끌다보니 경쟁 출판사와 차별화하기 위해 국어사전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보통 국어사전은 글자만 있는데 우리가 만든 ‘새사전’은, 예를 들어 ‘금강산’이면 금강산 그림이나 사진을 흑백이지만 넣었어요. 편집에 굉장히 신경을 썼죠. 그림은 출판사 미술부 화공이 그렸고요.”
1957년 동아출판사에 입사해 교학사에서 ‘교학국어사전’을 펴내기까지 50여년간 국어사전을 만든 서덕수 전 출판부장은 구술 도중 이 대목에서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민간 사전의 몰락
민간 사전 시장의 몰락은 1999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출간과도 맞닿아 있다. 남영신 회장은 “국어원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국가기관이 만들면 출판사들 다 망해 버리는데, 그 다음엔 누가 이런 사전을 만들겠느냐”고 성토했다.
인터넷 보급으로 종이사전 수요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국가가 어휘마다 표준 정의를 제공했다. 수지 맞추기도 버겁던 민간 출판사 사전팀의 역할마저 소멸됐다. 학계에선 ‘표준어가 득세하면서 방언들이 소멸됐듯, 어휘마다 표준 정의가 등장하면서 다양한 뜻풀이가 사라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나만 지금 (표준국어대사전을) 안 따라 가고 있어요. 내가 만든 사전을 보고 사람들이 가끔 전화를 해요. 표준국어대사전과 다른데 틀린 것 아니냐고. 그러면 ‘내 이름으로 낸 사전이다. 나는 이게 옳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썼다’고 말해요.”(남영신)
편찬자 5명의 증언을 채록한 김양진 교수와 오새내 강사는 이제 국어사전 교열·인쇄·판매 등에 참여했던 이들을 찾아내 인터뷰할 계획이다. 이렇게 수집되는 구술 자료는 내년 중반 국사편찬위원회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된다. 두 학자가 지금 만나려는 사람은 사전 활자체를 개발한 최정순씨, 교학사 국어과장을 지낸 김중일씨, ‘새우리말 큰사전’ 제작에 참여한 손형목씨, 민중서림 사전부에 근무했던 임대식씨 등이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