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 더 죽어야 내가 살아 남는다… 날마다 전투

입력 2010-05-20 17:48


남아공월드컵 카운트다운… 파주 NFC 4일간의 기록

지난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파주시 축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서 4대 4 미니게임이 시작됐다. 전날 에콰도르 국가대표팀과 국내 마지막 평가전을 치른 뒤 실시한 회복 훈련이다. 에콰도르전에 뛰지 못했거나 후반에 교체 투입된 선수 가운데 9명이 세 팀으로 나뉘었다.

노란조끼는 김형일(포항) 이승렬(서울) 조원희(수원), 빨간조끼는 강민수(수원) 구자철(제주) 김보경(오이타). 김정우(상무) 김치우(서울) 이영표(알힐랄)는 조끼 없이 유니폼만 입었다. 골키퍼는 정성룡(성남)에게 에콰도르전 주전을 빼앗긴 이운재(수원)와 김영광(울산)이 붙박이로 맡았다. 세 팀은 상대를 바꿔가며 10여분씩 번갈아 미니게임을 벌였다.

가벼운 몸 풀기일 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게임은 격렬했다. 조원희는 이영표를 거칠게 몰아붙이며 발목을 향한 태클도 서슴지 않았다. 김치우는 골키퍼 가슴에서 ‘퍽퍽’ 소리 나는 강슛을 연이어 날렸고, 수비 강민수는 이런 슛을 여러 번 몸으로 막았다. 허정무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유심히 지켜봤다.

몸이 재산인 선수들이 월드컵이란 큰일을 앞두고 왜 이리 거친 몸싸움을 벌일까. 이유는 4시간 만에 드러났다. 오후 3시 대한축구협회가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대표 26명 명단을 발표했다. 예비 엔트리 30명 중 조원희 김치우 강민수 황재원(포항)이 탈락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에콰도르전에 뛰지 못한 게 뭘 의미하는지, 함께 벤치를 지킨 이영표 등과 자신들의 위치가 어떻게 다른지. 대표팀 ‘살생부’ 공개 직전의 미니게임에서 이들은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파주 NFC. 지난 14∼17일 나흘간 지켜본 이곳의 봄은 여름보다 뜨거웠다.

월드컵, 살아남아야 간다

15일 오전 11시 훈련장에 기성용(셀틱)과 염기훈(수원)의 모습이 보였다. 오후 4시 공식 훈련보다 5시간 일찍 나타난 두 선수는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더니 1시간 동안 뜀박질을 했다.

염기훈은 2월 대표팀과 목포시청팀 연습경기에서 왼쪽 발등 뼈가 부러졌다. 경기에 다시 나선 것은 지난달 말. 시간이 없다. 에콰도르전에서 모든 걸 보여줘야 했다. 그는 “부상은 이제 괜찮아요. 월드컵에만 간다면 정말 잘할 자신 있습니다”라고 했다. 에콰도르전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전반전 헤딩슛이 크로스바를 맞췄고, 움직임도 시종 활발했다. 26명 엔트리에도 포함됐다. 그는 남아공행 티켓을 손에 쥔 걸까.

26명 엔트리에는 염기훈을 포함해 박주영(AS모나코) 안정환(다롄 스더) 이동국(전북) 이근호(이와타) 이승렬 등 6명의 공격수(포워드)가 있다. 투톱 시스템을 주로 쓰는 대표팀의 최종 엔트리 23명에 포함될 공격수는 4명 정도. 해외파 3명에 에콰도르전 결승골 주인공 이승렬 등 경쟁자 면면은 화려하다. 염기훈의 남아공행은 22일 출국하는 대표팀의 일본·오스트리아 전지훈련에서 결정된다.

대표팀 부동의 미드필더였던 기성용은 스코틀랜드 셀틱으로 옮긴 뒤 출장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지난 13일 훈련에선 허 감독에게서 “체력 기복이 심하다”는 지적도 받았다. 에콰도르전을 앞두고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개인훈련을 하러 나온 것이다.

실전 감각은 훈련을 많이 한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다. 기성용은 에콰도르전에서 한 박자 늦은 패스, 둔한 움직임 탓에 혹평을 받았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몸 상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경기 감각에는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선수들은 몸이 전부라 조금만 안 좋게 느껴져도 걱정을 많이 한다. 이들이 1년에 찍는 MRI(자기공명영상) 비용만 해도 엄청나다”고 말했다.

축구선수들에게 월드컵은 단순한 국가대항전이 아니다. 세계 유명 구단의 스카우터가 총집결한다. 좋은 플레이를 하면 러브콜이 쏟아지고 몸값이 치솟는다. 안정환이 그랬고,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그랬다. 월드컵 출전은 ‘제2의 박지성’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대표팀은 다음달 1일까지 23명의 최종 엔트리를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출해야 한다. 아직 3명이 더 떨어져야 한다. 살아남은 자만이 남아공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축구 대통령’ 박지성

전날인 14일 오후 4시 기자회견에 참석하러 허 감독과 함께 숙소를 나서던 박지성이 급하게 다시 뛰어 들어갔다. 1분 뒤 나타난 그는 축구화를 들고 있었다. 기자회견 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야간훈련이 있다.

“으이그 확! 군인이 총을 놓고 다니냐.” 정해성 수석코치가 어이없어 하자, 박지성은 “아… 챙기긴 했는데… 이건 예비용…”이라며 얼버무리더니 황급히 차에 올랐다. 언제 왔는지 순식간에 박지성을 에워싼 NFC 직원 20여명이 폭소를 터뜨렸다. 늘 축구선수들을 대하는 NFC 사람들도 박지성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몰려들어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첫 한국인 선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뛴 첫 아시아인. 거스 히딩크 감독의 애제자이자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의 전술적 병기. 박지성은 대한민국 축구 대통령이다. NFC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칭찬했다. 축구를 잘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축구협회 어웨이팀 수송책임자 정우열씨는 “박지성은 나이에 비해 참 성숙하다. 크게 성공한 지금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조금 뜨면 까불거리는 선수가 종종 있는데 박지성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정씨는 과거 국가대표였던 한 선수를 예로 들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스타덤에 오르자 고급 외제차부터 사더라고요. 축구협회 사람들이 겸손하게 굴라고 여러 번 조언했는데 막무가내였어요. 결국 이번엔 NFC에 오지 못했잖아요.”

박지성의 뒤를 이을 다음 ‘대통령’은 누구일까. NFC 직원들은 대체로 박주영을 꼽았다. 그동안 여러 선수가 ‘축구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박주영만큼 꾸준하게 자신을 발전시켜 온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박주영은 오른쪽 허벅지 햄스트링 부상을 입은 상

태다. NFC는 그의 컨디션 회복을 위한 전진기지에 가까웠다.

일요일인 16일 오전 10시30분. 박주영이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피지컬 트레이너가 스태프 3∼4명의 보좌를 받으며 직접 재활훈련을 진행했다. 스트레칭, 단거리 달리기, 전력질주 등등. 이 훈련 모습은 축구장 옆 망루에서 비디오 분석관이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훈련이 끝나자 최주영 의무팀장이 각종 검사 결과 등이 담긴 서류 뭉치를 들고 박주영을 1시간가량 면담했다. 박주영은 “몸 상태는 괜찮다. 재활훈련도 잘되고 있는 것 같다”면서도 월드컵 출전에 문제가 없는지 묻자 “아…. 그건 모르겠어요”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NFC에서 요즘 인기가 치솟고 있는 선수는 프리미어리거 이청용(볼턴)이다.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니며 누굴 만나도 먼저 인사를 건네는 ‘매너’ 때문. 에콰도르전이 끝나고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 인터뷰에서도 장시간 질문 공세에 친절히 답변해 취재진의 호평을 받았다.

“대통령한테도 못 내줘”

15일 토요일 오전 7시30분. NFC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청와대 직원 축구팀이 축구협회 직원팀과 경기를 하러 왔다. 여자축구 국가대표팀도 아시안컵 대회를 앞두고 훈련하러 왔고, 에콰도르 대표팀도 평가전 준비 훈련을 위해 나타났다.

NFC에는 천연잔디 구장 6개와 인조잔디 구장 1개가 있다. 청와대와 축구협회 팀이 구장 3개, 여자대표팀과 에콰도르팀이 각각 1개를 사용했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청룡구장과 그 옆 충무구장은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청룡구장은 남자 국가대표팀 전용구장이다. 여자 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청와대 축구팀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신동수 NFC 관리팀장은 “청룡구장은 대통령이 와도 내줄 수 없다. 남자 국가대표 선수들만 쓸 수 있는 구장”이라고 했다.

청룡구장은 국가대표팀을 위해 철저히 맞춤형으로 관리된다. 지난 겨울 한파에 NFC의 대나무들이 죽어나갔지만 청룡구장 ‘켄터키 블루그래스’ 잔디는 멀쩡히 살아남았다. 언제나 최상의 잔디 상태가 유지되도록 특별히 고른, 추위에 강한 품종이다. 쉽게 손상되는 골대 부근 잔디를 수시로 이식하기 위해 NFC는 아예 이식용 잔디를 직접 기르고 있다.

국가대표팀이 한번 움직이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오전 7시부터 3시간여 동안 탑승형 잔디깎기 기계 2대가 청룡구장 잔디 정리를 시작했다. 오후 2시30분, 관리팀이 새로 이식한 잔디를 보호하려고 구장 바닥에 덮어 놓았던 차광막을 걷어냈다. 30분 뒤 스프링클러 13개가 차례로 물을 뿜었다.

이어 기술 스태프들이 새로 도입된 무선 경기력 측정 시스템을 점검하고, 비디오 분석관이 망루에 올라가 카메라를 설치했다. 장비팀이 각종 훈련 장비를 구장에 들고 나왔다. 조리팀은 선수들이 훈련을 마치고 먹을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몸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체력 회복을 돕는, 영양가 높은 음식. 이날 메뉴는 만두전골이었다.

오후 4시, 드디어 대표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론에 공개된 훈련시간은 단 15분. 허 감독은 “카메라가 많으면 선수들 집중력이 떨어진다”며 양해를 구했다. 축구협회는 에콰도르전을 앞두고 NFC에 들어온 기자만 2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에콰도르전을 5시간 앞둔 16일 오후 2시. 조리팀이 바빠졌다. 경기 전 선수들이 먹을 ‘참’을 만들기 위해서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선수들은 점심식사 뒤 별도로 스파게티 같은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다. 이날 참은 김치말이 국수와 토마토치즈 샌드위치.

2시간 뒤 순찰차 2대가 들어섰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까지 가는 대표팀을 에스코트하기 위해서다. 버스에 오르는 선수들을 NFC 직원 20여명이 배웅했다. 조리팀 신동일씨는 “매일 보는 선수들이지만 경기에 나서는데 우리가 응원해야죠”라고 말했다.

처녀출전 16명… 세대교체 성공할까

월드컵은 세계 최고 선수들의 각축장이지만 선수들의 몸값과 성적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우승한 주최국 프랑스는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고, 2006년 독일월드컵에선 브라질과 잉글랜드가 8강전에서 각각 패해 보따리를 싸고 귀국했다.

한일월드컵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숙박과 교통편을 총괄했던 축구협회 관계자는 “당시 잉글랜드 선수들은 정말 가관이었다”고 했다. 스웨덴 출신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의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감독이 훈련을 지시해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대표팀 주장 데이비드 베컴에게만 이것저것 묻기 바빴어요. 선수들이 베컴을 신처럼 떠받드는 바람에 감독이 팀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더라고요.”

제주도의 한 호텔을 통째로 빌려 “우린 우승하러 왔다. 이방인은 들일 수 없다”며 축구협회 직원의 호텔 상주도 거부했던 잉글랜드는 8강전에서 브라질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 평가전을 위해 입국한 에콰도르팀은 정반대였다.

“에콰도르 선수들은 감독이 손짓만 해도 줄줄이 버스에 오를 정도로 잘 조직돼 있더군요. 2010 남아공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아르헨티나와 맞붙어 1승1무 성적을 올린 비결을 알 수 있었죠. 감독이 선수들을 장악하지 못한 팀치고 좋은 성적을 내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결국 축구는 조직력 싸움이란 얘기다. 한국 대표팀이 2002년 월드컵 4강에 오른 것도 6개월이나 합숙훈련을 하며 쌓아올린 조직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26명 엔트리에서 16명이 월드컵 처녀출전이다. 해외파 소집이 어려웠기 때문에 합숙 기간은 한 달 정도에 불과하다. 급격한 세대교체를 겪은 한국이 과연 남아공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까.

조영증 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은 “기록경기와 달리 축구에선 깜짝 스타가 나올 수 없다. 세계 각국의 명단을 보면 검증 안 된 선수들이 거의 없다. 아무리 잘해도 젊은 선수만으로 경기 흐름을 지배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노쇠했다’는 우려에도 안정환 김남일 등 백전노장들이 허정무호에 다시 불려온 것도 이 때문이다. 조 국장은 “세대교체도 중요하지만, 축구는 생각보다 보수적인 스포츠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은 주로 지고 있는 상황 등에서 조커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주=글 강준구 기자, 사진 김지훈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