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와 MB 책전쟁 누가 이길까… 서거 1주기, 서점가에 ‘노무현 현상’ 왜?

입력 2010-05-20 20:08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다. 추모열기가 만들어낼 ‘노풍(盧風)’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건 6·2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만이 아니다. 올봄 노풍을 제일 먼저, 가장 세차게 맞고 있는 건 출판가다.

4월 하순 나온 노 전 대통령 자서전 ‘운명이다’는 벌써 몇 주째 베스트셀러 1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노무현 관련 책은 지금까지 128종이나 출간됐다. 전·현직 대통령으로는 역대 최다. 그것도 모자라 며칠 건너 한 권씩 신간이 쏟아진다. 서점에는 특별 판매대와 기획전이 마련돼 손님으로 북적인다.

그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지적으로 소비된 적이 없다. 금기 대상이거나 관제 냄새를 풍겼다. 기록은 없고, 비판은 견제 받았다. 기록과 비판을 뺀 출판물이 살아남을 공간은 없었다. 간혹 주목받은 건 청와대 입성 전 ‘안전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2010년 출판가 노풍은 사건이다. 대통령이 책으로 기억되고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브랜드

그가 썼거나, 그에 대해 말하거나, 그를 논하면 무조건 화제가 됐다. ‘운명이다’(유시민 정리)는 출간 이래 교보문고, 예스24 등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한 달 만에 보급판(페이퍼백) 판매는 10만부를 넘어섰다. 3만부 한정판 양장본은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다.

지난해 9월 출간돼 이미 15만부가 팔린 회고록 ‘성공과 좌절’은 지난주부터 서점 출고량이 2배씩 뛰고 있다. 서거 1주기를 앞두고 ‘내 마음 속 대통령’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진보의 미래’ ‘노무현이 꿈꾼 나라’ ‘노무현이, 없다’ ‘노무현이 만난 링컨’ ‘사람 사는 세상’ 등 관련 도서도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워 리더’로서 노 전 대통령의 영향력도 진작 확인됐다. 그가 읽으면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과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는 서거 전 열독했던 책으로 알려지면서 주문이 폭주했다. 5년간 8000부가 팔렸던 ‘유러피언 드림’은 지난해 하반기에만 2만4000부가 판매됐다. ‘미래를 말하다’ 역시 1만2000여부가 추가로 팔려나갔다. ‘유러피언 드림’을 낸 민음사 담당자는 “노무현 변수가 없었다면 1년에 1000부 정도 나갔을 책이다. 20배 증가 효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 사진 12장을 담은 2010년도 달력은 추모 열기와 함께 7만부 넘게 판매됐다. 노무현재단 관계자는 “원래 지지자용으로 제작됐는데 문의 전화가 빗발쳐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5만부를 추가로 찍어냈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왜 팔리나

‘노무현 현상’을 논하려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말해야 한다. 함성득 고려대 교수(대통령학)는 노무현 브랜드의 상품성을 ‘비극, 상징성, 인간적 매력’의 세 가지로 설명했다.

함 교수는 “역사에 남는 건 비극적 죽음이다. 노무현 현상에는 그의 최후에 대한 추모와 동정이 제일 크게 작용했다”고 해석했다. 여기에 소외층 대변자라는 상징성과 ‘바보 노무현’으로 표현되는 인간적 매력이 보태졌다. 이한기 오마이북 출판교육국장도 “느닷없는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궁금증, 여운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직설화법은 재임 중 끊임없이 설화(舌禍)를 일으켰다. 역설적으로 저자 노무현에게 직설법은 장점이 됐다. 김태수 학고재 편집국장은 “순수하게 작가의 측면에서 평하자면 노 전 대통령은 가식 없고 솔직한 라이터다. 에두르지 않고 핵심을 찌르는 화법이 매력적”이라고 평했다.

‘하필 왜 책인가’는 주목할 대목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노무현’이 우리 사회가 다 이해하지 못한 질문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책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책으로 기억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뜻 아닐까. 누구였을까, 왜 그랬을까. 끊임없이 묻는다. 그 의미를 각자 마음에서 재고(再考)하는 과정이 책읽기로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다음 달 출간되는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를 기획한 이한기 국장은 노 전 대통령을 ‘책으로 안내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고민을 쫓다 보면 그가 읽던 책이 나오고, 그 책을 읽으면 다시 그의 가치를 떠올리게 된다. 고인이 독서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출판가의 노무현 바람은 의미 있다.”

임동욱 충주대 행정학과 교수(한국대통령학연구소 부소장)는 ‘노무현 현상’을 ‘노무현 정치에 대한 지지’와 혼동해선 안 된다고 경계했다. “노 전 대통령이 가진 필력과 단문의 힘은 유서에 잘 드러난다. 메시지에 마음을 담고, 공감을 끌어내는 능력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가고자 한 길이 옳았느냐 하는 문제는 남는다.”

노무현 현상, 그 속에 담긴 이야기

현재까지 노무현을 키워드로 출간된 도서는 128종(예스24 집계).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 지도자 중 한 명인 박정희 전 대통령(121종)보다 많다. 다독가이자 사상가로 명망이 높은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저서는 115종,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종에 불과하다.

다루는 주제와 장르, 필자의 폭도 전례 없이 넓다. 자서전과 회고록뿐만 아니라 정치인 노무현론, 진보정치에 대한 담론, 참여정부 정책 비판, 정치역정에 대한 평가서, 민주주의 연구서, 지지자의 추모글도 있다. 참모, 학자, 예술가, 회사원 등이 각자의 영역과 수준에서 노 전 대통령을 논했다. 독자의 ‘읽고 싶다’는 요구만큼이나 ‘쓰고 싶다’는 필자의 욕구가 폭발한 것이다. 배경에는 열혈 지지층, 일종의 ‘팔로어(follower) 문화’가 존재한다.

장은수 민음사 대표는 “출판계에서 브랜드 파워를 가지려면 신념과 그 가치를 따르는 추종자가 있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인기는 그를 중심으로 한 신념 공동체가 위력을 발휘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임동욱 교수도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의 광장과 효순·미선이 사건 당시 촛불의 에너지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 그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하나의 집단을 대표한다. 그런 지지집단이 만들어낸 것이 서점가의 노풍”이라고 분석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이를 ‘역사기록 작업’으로 표현했다.

“참여정부는 불합리한 구조 때문에 국민과의 소통을 방해받았다.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의 뜻을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책을 쓰는 거다. 기록의 측면도 있다. 정의(正義)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만 기록을 남긴다. 역사가 평가하도록 기록하고, 책으로 싸우고 있다.”

대통령들의 책 전쟁

전·현직을 통틀어 청와대가 배출한 최고 베스트셀러 저자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1995년 출간된 ‘신화는 없다’가 판매량 65만부로 수위를 고수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관련 책은 상위 5권을 모두 합산해야 50만부 안팎이 팔렸다. 물론 노풍이 계속되면 1위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이 대통령 저서는 ‘소문 없이 조용하게 많이’ 팔린 게 특징이다. 기업체나 관공서의 단체구매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노 전 대통령 책은 ‘시끄럽고 떠들썩하게’ 소비된다. 판매량이 늘면 온라인 댓글과 리뷰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이런 차이는 양측 지지자들이 움직이는 방식과도 닮았다.

1위 ‘신화는 없다’(이명박), 2위 ‘성공과 좌절’(노무현), 3위 ‘온몸으로 부딪쳐라’(이명박), 4위 ‘여보, 나좀 도와줘’(노무현), 5위 ‘어머니’(이명박), 6위 ‘대통령 보고서’(노무현 대통령 비서실), 7위 ‘흔들리지 않는 약속’(이명박), 8위 ‘운명이다’(노무현). 교보문고가 참여정부 출범 이후인 2003년부터 2010년 현재까지 집계한 대통령 관련 저서 판매량 순위다. 흥미롭게도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 이름이 번갈아 나온다.

글=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사진=홍해인 기자(교보문고 협조), 그림=한국미래발전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