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15) “귀한 사람 먹는데 좋은 재료로 만들자”

입력 2010-05-20 17:22


어린 나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 주셨던 김성돈(전주 전동교회 원로) 목사님께서는 내가 고추장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도 길을 뚫어 주셨다. 전주에서 순창까지 같은 노회 소속 동료 목사님들을 죄다 이끌고 고추장을 사러 오신 것이다.

“우리 설 집사가 고추장을 맹글어 판다는디, 내가 모른척 할 수 있간디? 내 설 집사 야무진 건 열 살 먹었을 적부터 알아 봤응게. 고추장 맛도 확실할 거여!”

김 목사님의 그 말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응원이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할 일이 맞나’ 하며 자신 없어지곤 했던 마음이 확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오신 목사님들에게 그분들이 구입한 고추장만 달랑 들려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담가놓은 장아찌를 다 꺼내 와서 한 분당 두세 가지씩 싸드렸다. 놀란 친정어머니가 옆에서 눈치를 주셨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가시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좋은 쌀이랑 좋은 고춧가루 써서 잘 맹글었기에 망정이지, 싸게싸게 만들어서 이문 남길라고 했으믄 목사님들 볼 낯이 없을 뻔했고만….’

돌아보면 사업 시작 직후에 이런 마음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교회를 다니고, 매주 설교로 하나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처음부터 세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조금이나마 살림살이 펴지고, 애들 가르칠 수 있도록 한 푼이라도 벌려고 시작했다는 게 솔직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판 고추장을 먼저 내 오빠, 남동생, 그리고 그 가족과 직장동료들이 먹도록 하셨다. 다음으로는 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고향 목사님이 고추장을 사 가셨다. 나로서는 ‘귀한 사람들 먹이는 것인디, 다음번에는 더 좋은 재료로다가 더 반듯하게 만들어야 쓰겄구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점차 모르는 사람들이 구입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좋은 고추장을 먹게 해주고픈 심정은 그대로였다.

그 마음이 ‘순창전통별미고추장’에 대한 내 철학이 됐다. 순창에서 재배된 가장 좋은 재료, 가장 깨끗하게 키운 재료로 가장 맛있는 고추장과 장아찌를 만들자는 철학 말이다. 때문에 우리 상품은 다른 집에 비해 가격이 조금씩 비쌌다. 지나가다 들른 사람들은 “여기만 왜 비싸요?” 하고는 그냥 가기도 했다. 나는 “싼 재료로 만든 넘 찾는다믄 얼마든지 싼 데로 가시랑게” 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사간 사람들은 또 찾아왔다.

첫해 고추장 장사는 그렇게 성공을 거뒀다. 다음해는 처음의 5배인 쌀 5가마 분량의 고추장을 담갔다. 그 다음해는 10가마, 다음해는 20가마…. 이렇게 해서 지금은 매년 100가마 분량의 고추장을 담근다. 재료로 들어가는 고추만 14t 트럭으로 열네 차다.

30년 가까이 해 왔지만 고추장 사업에 있어서는 역경이 거의 없었다.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드릴 일이다. 딱 한번 억울한 일은 있었다. 1996년쯤이었다. 인근 가게에서 어느 정부 기관에 대량으로 납품하던 고추장이 공장에서 만든 싸구려 고추장을 섞어 판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문제는 얼마 후 그게 우리 집 일인 것처럼 소문이 났다는 것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