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규모 줄여라, 다른 조직 두목들 참석말라”… 조폭 두목 고희宴 경찰 팽팽한 신경전

입력 2010-05-19 21:49

19일 오후 서울 역삼동 한 특급호텔 앞. 벤츠와 그랜저, 에쿠스 등 검은색 고급 승용차 20여대가 잇달아 도착했다. 50∼60대 남성들이 차량 뒷문으로 내렸다. 검정 정장 차림에 20∼30대 ‘덩치’들이 호위했다. 호텔 입구로 걸어가는 동안 젊은 남성들은 무표정하게 주위를 살폈다.

“요새 잘 지내? 자네 몸 보니 운동 좀 하나 보군. 나는 배가 나와서 말이야. 하하.”

구릿빛 피부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뒤로 넘긴 50대 남성이 입구에서 호탕하게 말했다. 그의 곁에 바짝 붙은 20대 남성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호텔 곳곳에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보였다.

원로 조직폭력배의 칠순잔치를 두고 경찰과 폭력조직이 신경전을 벌였다. 1950∼60년대 서울 영등포 일대에서 활동하다 와해된 새마을파의 전 두목 이모(70)씨가 이날 자신의 고희연을 열었다. 이씨는 전국구 폭력조직 ‘칠성파’ ‘양은이파’ ‘범서방파’를 비롯해 주먹계 후배 수백명을 불러들였다.

폭력조직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애·경사를 계기로 주변 폭력조직을 초청해 합종연횡을 도모하거나 세를 과시하고 있다. 2008년 이후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 서울호텔에서 열린 행사만 10회다.

경찰은 이씨의 고희연을 앞두고 행사 규모를 줄이도록 유도했다. 거물급 조직폭력배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위화감을 조성하고 자칫 폭력사태까지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씨에게 가족과 친인척 위주로 행사를 열라고 설득했다. 폭력조직 두목들에게는 행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행사장인 호텔 주변에는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기동대와 광역수사대, 강남경찰서 강력팀, 경찰특공대 등이 배치됐다. 경찰은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증거 수집에 들어갔다. 행사장에 나타나면 나중에라도 조치하겠다는 신호였다. 결국 거물급 조직폭력배는 대부분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잔치 주인공인 이씨는 “생일이라 기분이 좋다”면서도 “남의 잔치에 경찰들이 이렇게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 380명분 식사를 준비했는데 경찰이 다 망쳐 놨다”고 말했다. 4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연회장은 절반을 못 채웠다. 방문자도 대부분 본 행사를 마치자마자 돌아갔다.

경찰 관계자는 “행사에 참가한 폭력배를 파악해 조직 간 연계나 불법행위 여부를 수사할 방침”이라며 “앞으로도 폭력조직이 관련된 행사는 초기부터 엄중히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강창욱 유성열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