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장희] 손학규와 친노

입력 2010-05-19 17:58


초야에 묻혀 지내던 한 사내가 바쁘게 짐을 싸고 속세로 나선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는 듯 발걸음이 부산하다. 그가 급하게 찾은 사람들은 ‘폐족(廢族)’ 위기에 몰렸던 가문의 후예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적장이 코앞에 있는 데도 여전히 ‘내가 맞수’라며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죠.”

그는 일합을 겨뤄 결과에 승복할 것을 권했고, 갈라졌던 폐족의 후예들도 대의를 위해 뜻을 합친다.

무협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이 같은 장면이 지난주 정치권에서 재연됐다. 바로 야권 경기지사 후보 단일화와 민주당 손학규 전 대표 얘기다.

민주당은 3연패(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 뒤 맞이한 절호의 설욕기회를 날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승리를 위해 야권 제세력들은 단일화를 부르짖었지만, 막상 협상에선 쥐꼬리만 한 기득권을 서로 놓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를 앞두고 기대했던 노풍(盧風)도 천안함 사태라는 대형 안보 이슈에 묻혀버린 상황이었다. 당내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공천 잡음으로 계파갈등은 심화돼 갔고, 원내대표 선거에 나섰던 후보들 모두 자신을 비주류라고 자처할 정도로 지도부 리더십은 흔들렸다.

이때 춘천에서 닭을 키우며 세월을 낚고 있었던 손 전 대표가 홀연히 나섰다. 그는 야권 단일화의 중재역을 자임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반대급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가 안 되면, 또 단일후보가 낙선한다면 그 책임을 다 뒤집어쓸 수 있다’는 주위의 걱정도 컸다. 그러나 그는 “경기도 지사 후보 단일화가 이번 지방선거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깨지게 생겼으니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워낙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가 독주하고 있기 때문에 단일화가 성사되지 않으면 선거는 해보나마나 한 게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지금까지는 그의 판단이 들어맞고 있다. 0.96% 포인트 차이로 승부가 갈린 단일 후보 경선은 드라마틱했고, 잠자던 야당 성향의 표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도권 ‘빅3’ 후보 중 최강자로 여겨졌던 김문수 지사와 야3당 단일후보와의 지지율 격차도 ‘해볼 만 한’ 수준으로 좁혀졌다.

선거 결과가 나오지 않아 손 전 대표에 대한 평가는 유보된 상태다. 다만 이미 손 전 대표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게 중평이다. 친노 후보끼리 맞붙은 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의 산파 역할을 함으로써 그동안 껄끄러웠던 친노 진영과의 관계 개선 기회를 만든 것이다. 경기도지사 시절 손 전 대표는 노 전 대통령과 각을 세웠고, 노 전 대통령도 손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탈당했을 당시 ‘보따리 장수’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류가 달라졌다. 유시민 후보는 손 전 대표에 대한 기억을 묻자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마자 가장 먼저 위로 전화를 해준 정치인”이라고 고마워했다. 친노계 한 의원은 “친노 진영이 아직 손 전 대표를 지도자로 받들 수는 없지만, 동지로 인정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무협영화에 비유해보자. 영화에선 모든 상황을 정리한 사내는 영웅이 되지만,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조용히 떠난다. 그렇다면 손 전 대표도 선거가 끝나면 다시 춘천으로 돌아갈까. 측근들은 “이번엔 지방선거 지원을 위해 나선 것일 뿐 아직 여의도로 복귀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손 전 대표 역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손 전 대표 자신도 복귀 시점에 대한 결단을 아직 못 내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손 전 대표는 야권 후보단일화 협상이 깨졌을 때 “뭔가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여의도로 돌아가라는 ‘뒤통수를 때리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한장희 정치부 차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