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솔향에 마음 씻으니 ‘선비의 기개’ 절로… 속살 드러내는 ‘봉화 솔숲길’
입력 2010-05-19 17:33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있다. 성춘향과 변사또에서 유래된 말이 아니다. 영동선을 개설할 당시 직선으로 설계된 노선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가 고향인 국회의원이 춘양면 소재지를 U자 형태로 돌아나가도록 억지로 끌어들여 생겼다는 말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목재상들이 춘양장날에 저마다 자기가 파는 소나무가 진짜 춘양목이라고 우겨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금강송 중에서도 춘양면 일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춘양목이라 부른다. 1980년대 초까지 춘양역을 통해 금강송이 실려 나갔기 때문에 부르는 금강송의 별칭이다. 늘씬한 미녀를 연상하게 하는 춘양목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지난해 춘양역에 정원수로 심은 25m 높이의 춘양목은 모두 16그루. 운반비를 제외한 나무 값이 한 그루에 2500만원이란다. 궁궐 등 문화재 보수용으로 애지중지하는 그 값비싼 춘양목이 봉화에는 수두룩 빽빽하다. 춘양목을 포함하면 오지 땅값이 서울 강남보다 비싼 동네라고나 할까.
춘양역에서 사과꽃 향기 그윽한 88번 지방도를 타고 태백산사고지를 스쳐 지나면 영화감독 김기덕씨의 고향인 서벽마을이다. 백두대간 남쪽에 위치한 서벽마을은 글자 그대로 서(西)쪽의 벽(壁)이라는 뜻. 주실령이 뚫리기 전까지 이 마을은 서쪽의 옥돌봉(1242m)과 문수산(1205m) 줄기에 가로막혀 오랫동안 오지로 남아 있었다.
서벽마을에서 춘양목 숲으로 가는 임도는 조팝나무 꽃길. 순백의 꽃길을 만난 젊은 여인이 한 마리 나비처럼 조팝나무 꽃향기에 취해 너울너울 날갯짓을 한다. 100㏊ 넓이의 서벽 춘양목 숲에서 문화재 보수용으로 선택된 춘양목은 1500여 그루. 1.5㎞ 길이의 탐방로를 따라 전봇대처럼 쭉쭉 뻗은 춘양목이 신록 속에서 나날이 몸무게를 더하고 있다.
소나무 중 으뜸인 춘양목은 선비의 기상을 닮았다. 춘양목은 혹독한 추위에 더 당당하고 계절이 바뀌어도 푸른색을 잃지 않으며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춘양목은 예로부터 시나 그림의 소재로 사랑을 받아 왔고 암울했던 시절엔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서벽 춘양목 숲을 포함한 서벽리 일대가 최근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고 있다. 광릉수목원보다 4.5배나 더 넓은 5179㏊ 규모의 국립백두대간봉화수목원 조성사업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억지춘양’이라는 오명에 씁쓸해하던 춘양역은 이제 솔숲길 트레킹의 출발점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석천계곡에서 닭실마을과 띠띠미마을을 거쳐 우곡성지에 이르는 17㎞ 길이의 솔숲길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청정자연이 어우러진 트레킹로. 울창한 송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석천계곡에 들어서면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씨를 새긴 바위가 닭실마을 이정표 역할을 한다. 청하동천은 신선이 사는 계곡이란 뜻. 옛날에 닭실마을의 진입로였던 석천계곡은 900m 남짓.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너럭바위를 흐르는 청류와 낙락장송의 솔잎을 스쳐 지나는 잔잔한 바람소리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처럼 청아하다.
석천계곡을 벗어나면 문수산 자락 끝에 둥지를 튼 닭실마을이 낙락장송을 배경으로 동양화를 그린다. 닭실마을은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의 지형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 조선 중종 때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의 후손들이 500년 가까이 지켜오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봉화 닭실마을은 안동 내압마을과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꼽은 영남의 4대 길지(吉地) 중 하나.
닭실마을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청암정이라는 정자. 권벌이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바위 주변에 인공연못을 조성했다. 청암정은 석천계곡의 석천정사와 함께 현존하는 전국의 정자 760여개 가운데 102개를 보유한 봉화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정자.
482점의 보물을 보유한 닭실마을은 독립투사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일제가 이를 두고 볼 리 없다. 일제는 춘양목을 실어 나른다며 철길을 설계할 때 곧은길을 놔두고 일부러 마을 앞으로 휘돌아나가도록 했다. 닭과는 천적인 지네 모양의 철길을 놓아 닭실마을의 정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닭실마을에서 마을 길과 하천 길을 따라 토일, 새말, 탑평 등 기와집이 멋스런 옛 마을을 지나면 진성 이씨 집성촌인 봉성면 동양리 와란마을이 나온다. 와란마을 입구에는 수십 그루의 노송이 군락을 이룬 솔밭이 선비처럼 고고한 자세로 나들이객을 맞는다.
퇴계 이황의 ‘수신십훈(修身十訓)’이 새겨진 비석은 마을숲에 자리를 잡고 있다. ‘스스로 성현이 되겠다고 뜻을 세워라’, ‘모든 예절을 한 몸에 갖추도록 경건하라’ 등 퇴계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생활화하라는 마을 어른들의 깊은 뜻을 담아 세운 것이다. 솔숲에는 나그네들을 위해 벤치도 놓여있다.
유홍준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나는 지금 봉화를 쓸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면이 모자라서도 아니다”고 기록했다. 봉화를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한 살아 있는 민속촌이라고 극찬한 그는 “봉화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봉화의 전통마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며 봉화 답사기를 포기했다.
워낭소리 애잔한 그 봉화에 이제 명품 솔숲길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 다치지 않도록 있는 길을 지도상에서 연결하는 작업이다.
봉화=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