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14) 판로 염원 기도에 기적처럼 손님 찾아

입력 2010-05-19 21:17


1983년 12월 20일이었다. 고추장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쌀 한 가마를 들여 담근 고추장들이 항아리마다 가득한데 팔 방법이 없었다. ‘괜히 일을 벌였나…’ 하며 한숨짓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서울에 사는 시누이였다.

“언니, 고추장 판다고 맨들었다면서요?” “응, 그라지, 근데 무슨 일이당가?” “고추장 1㎏ 50개만 싸서 부쳐주시라고요.” “뭣 헌다고 그렇게 많이?” “우리 아저씨 댕기는 동사무소 직원들헌티 돌릴라고 그라지요. 고추장 하면 순창 고추장인지 서울 사람들도 다 아는디, 이번 참에 지대로 맛보라고요. 어차피 연말이면 선물 돌리고 헌께.”

그렇게 해서 처음 고추장 판 돈을 만져 봤다. 개당 8000원씩 총 40만원이었다. 그 돈을 쥐니 용기가 생겼다. 고추장 장아찌도 담가 팔자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재료를 산더미처럼 사들였다. 문제는 일손 부족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오셔서 고추장 간 보는 것부터 두루두루 도와주셨지만 더덕이며 마늘 까는 일까지는 둘이서 다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딸아이들을 동원했다. 큰 대야마다 더덕과 마늘, 도라지가 산더미처럼 담긴 방에 초등학교 2학년인 큰딸은 물론 7세 둘째, 3세 셋째까지 불러놓고 “엄마가 바쁜게 느그들끼리 이거 다 까놓그라” 했다.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우리보고 이걸 다 까라고요?”하는 큰딸에게 “그려, 니는 엄마 도와서 많이 해 봤제? 동생들 잘 갈켜 가면서 혀봐” 했다.

반나절쯤 후 들어가 보니 더덕과 마늘은 그럭저럭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 손이 엉망이었다. 손톱마다 흙물이 들고 여린 손끝이 거칠거칠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딸들은 방실방실 웃으며 “우리 잘했지요?” 한다. 칭찬 한 마디 없이 나는 큰딸을 보고 “앞으로 씨잘데없이 밖에 나가 돌아댕기지 말고 학교 땡하면 집에 와서 동생들 데불고 마늘 까야 헌다” 했다. “매일 허라고요?” 하면서 큰딸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 뒤로 딸들이 참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뒤에 태어난 넷째까지 딸들은 모두 중·고교 다닐 때까지 늘 집에만 오면 마늘과 더덕 까느라고 손이 쉴 틈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그럼에도 네 딸은 한 번도 싫은 소리 안 하고 착하게 잘 자라줬다. 학원 한 번 못 보냈어도 대학 가고 취직해서 다들 잘 살고 있다. 어릴 때 하도 고생을 시켜서 자란 뒤에는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큰딸 은영이는 자진해서 내 곁에 살며 사위와 함께 일을 도와주고 있다. 무엇보다 모두 신앙심이 깊다는 것이 가장 고맙다.

처음에는 그렇게 가족과 친척들이 도와줘서 고추장을 팔았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쪽 일은 입소문이 중요한데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소문이 날지 기약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기도를 했다.

“하나님,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는 안 허겠습니다. 교회도 돕고, 하나님 일 할 수 있게끔 고추장 팔 곳 좀 마련해 주셔요.”

그런데 얼마 후에 집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어릴 때 고향에서 나를 전도한 전도사님이다. 그 후 안수 받고 전주 전동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던 김성돈 목사님께서 같은 노회 목사님들을 죄다 이끌고 오신 것이었다. “우리 설동순 집사가 고추장을 판담서? 나가 좀 팔아주러 왔지.”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