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부모 됨

입력 2010-05-19 17:30


에베소서 6장 4절

저희 교회 앞 교하고등학교 3∼4층 교실은 늘 밤늦도록 불이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늦은 밤이면 무수한 차들이 하교하는 학생들을 마중하기 위해 북새통을 이룹니다.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읽혀지는 눈물겨운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가부(家父, paterfamilias)의 역할은 자신의 독선적 결정과 행동으로 자녀가 분노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 본문이 쓰인 로마 시대는 가부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가부는 집안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과 물건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독재적인 아버지의 힘은 징계하는 권리뿐 아니라 새로 난 아이를 죽이는 것, 자녀들을 유기하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노예나 물건들을 처리할 때처럼 자녀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농장에서 쇠사슬에 매어 일을 하게 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사형선고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늘도 웬만한 아버지를 포함한 부모는 집안에서 강자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뜻을 자녀들에게 집행합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학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자녀를 통해 보상 받고자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자녀들은 또 부모의 지나친 편애나 빈정댐으로 분노합니다. ‘세상은 다 그런 거야’ ‘너도 세상을 살아 봐’라는 식의 냉소적 태도 속에 자녀들은 반사회적인 장애를 안고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라 했을 때에 자애롭고 합리적이며 따스한 아버지를 떠올리는 자녀들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은 가부의 권위를 행사하기보다는 자제를 통해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도우라고 가르칩니다. 절제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인내하는 교육자의 태도를 지닐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됨의 특징인 상호 복종(엡 5:21)이 부모와 자녀 간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가령 놀고 있는 자녀에게 “자 그만하고 가자!”가 아니라, “조금 있다 떠나야 한다”라며 떠남을 자녀들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존중하여 이끄는 것이 그 길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녀들이 원하는 바대로만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 안에서 양육하라”고 했을 때, 교양이란 일종의 훈육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훈육은 슬퍼 보일 만큼 따끔한 것이어야 합니다(히 12:11). 돌봄이라는 것은 결코 자유방임주의가 아닙니다. 충분히 경고했는데도 자녀가 올바르지 않게 행동할 때, 부모는 바른 징계를 해야 합니다. 부모들이 그 훈육을 위한 선명한 동기를 설명하고 벌을 집행할 때 자녀들은 노여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부모들은 또 훈계를 통해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훈계란 율법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원리를 말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를 가르쳐 주고, 그 가치들을 자녀들과 함께 방어하여 그들이 그 성경적 가치를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 공부를 시키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율법을 자녀들에게 주는 것입니다(잠 22:6). 가정의 달, 가정 행복의 원리를 다시 성경에서 찾아야 할 때입니다.

김희승 목사 (파주 하늘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