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혹한의 홋카이도 피해간 남태평양은 죽음의 바다”
입력 2010-05-18 22:14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3부 강제동원 더 깊이 들여다보기
① 남양군도, 휴양지 속에 깃든 피눈물
일제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깊고도 넓다. 국민일보는 경술국치 100년 시리즈 1·2부를 통해 1938∼1945년 당시 일본 전범기업들이 일본 본토에서 자행했던 조선인 노무자 인권유린 현장을 추적했다. 그러나 조선인 강제동원은 그 범위가 일본 본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열대의 태양이 작열하는 머나 먼 남태평양 일대 군도(群島)와 동토의 땅 러시아 사할린에도 조선인의 또 다른 비극이 어려 있다. 이역만리 노역장에서 끝내 숨을 거둔 채 현지에 그냥 방치된 조선인들의 유골은 강제징용 문제의 가장 어두운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들춰볼수록 아프지만, 강제동원의 더 깊은 속내를 조명해 본다.
짙은 코발트색 바다와 산호초로 둘러싸인 백사장. 변함없는 연중 27도 기온에 온화한 무역풍이 쉴 새 없이 부는 휴양지. 지난달 27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4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미국 자치령 북마리아나제도(NMI) 사이판(Saipan)은 남국의 낭만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현실을 생각하면 그저 즐길 수만은 없는 곳이다. 취재에 동행한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 조사위원회)’ 김명환 팀장은 “일렬로 늘어선 북마리아나제도의 섬들은 미군에 의해 ‘일본으로 가는 사다리’로 불렸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이곳에서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해, 일본군은 본토 영공 사수를 위해 사활을 걸고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일본군의 옥쇄 작전으로 사이판에서만 6만명가량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얼마만큼의 조선인이 포함돼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천명 규모로 추정할 뿐이다.
남양(南洋)을 택한 이유
마주현(82) 할아버지는 1941년 12월 전북 장수에서 난요코하츠(남양흥발·南洋興發) 주식회사에 징발돼 사이판 사탕수수 농장으로 동원됐다. 전남 여수에서 배를 탄 뒤 5일간 항해 끝에 사이판 중심 도시 가라판(Garapan) 위쪽 항구에 닿았다. 가는 도중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2월 7일이었다. 마씨는 강제동원 조사위원회 구술 조사에서 “우리가 탄 배에 일본 군함이 다가와 서치라이트를 주욱 비쳤다”고 말했다.
왜 남방행을 택했을까. 마씨는 “석탄광으로 가는 것보다 그래도 낫다고 그러더라고. 사탕수수 농사 짓는 데라 사탕 같은 건 실컷 먹을 거 아니냐고”라고 진술했다. 남양군도(南洋群島·남태평양제도)를 가게 된 노무자들은 대부분 “(일본) 홋카이도와 남양군도 중 택일하라”는 협박에 혹한의 홋카이도(北海道)를 피해 따뜻한 남쪽을 택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김 팀장은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이 지역 노무동원 대상자의 생환율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말했다. 일본 본토에 동원된 노무자 사망률이 최대 6%인 점과 견줘 보면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설탕왕’ 마쓰에 하루지
마씨가 첫발을 내디딘 가라판 지역은 과거 일제의 행정기관이 밀집했던 곳이다. 지금은 하얏트호텔과 면세점 등 고급 휴양시설이 밀집해 있다. 미군이 폭격을 하지 않은 병원 건물만 그대로 남아 지금은 북마리아나제도 역사문화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박물관 위쪽으로 올라가면 에메랄드빛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에 설탕왕(Sugar King) 공원과 일본 신사가 복원돼 있다. 설탕왕 마쓰에 하루지(松江春次)를 기리기 위한 시설이다.
마쓰에는 1921년 난요코하츠를 설립했다. 민간기업이긴 하지만 일본 해군이 설탕의 본토 수송 등에 깊이 관여하고, 한반도를 수탈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자금을 댄 사실상의 국책기업이다. 일본은 1919년 위임통치 형태로 지금의 팔라우공화국에 남양청(南洋廳)을 세워 남양군도를 지배했다. 남양군도는 동쪽 팔라우부터 서쪽 마셜제도까지 태평양 일대의 섬 지역을 가리킨다.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가해 얻은 전리품이었다. 남양청은 1922년 제당 규칙을 만들어 난요코하츠가 일본 내 설탕 반입을 독점하도록 도왔다.
마쓰에는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 유학생 출신이었다. 그래서 사탕수수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빨리 알았다. 초기 대만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개척한 마쓰에는 1923년 본사를 도쿄에서 사이판 찰란카노아(Chalan Kanoa)로 옮기고 제당 공장도 세웠다. 사이판 전체를 사탕수수 농장으로 재편하는 한편 이를 수송할 철도도 깔았다. 부족한 노동력은 한반도 등지에서 마구잡이로 끌어온 노동자들로 충당했다.
난요코하츠는 사이판 인근 섬은 물론 자회사 등을 통해 남태평양 전체에 진출했다. 1942년 7월에는 자본금이 5000만엔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자 설탕 수송 길이 막혀 몰락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사이판 일대 상륙작전 때는 회사의 제당 관련 기반시설이 폐허로 변했고, 종전(終戰) 후 미군정 시기에는 전범기업으로 분류돼 소멸했다.
어제의 패전을 기억하는 일본
회사는 사라졌지만 마쓰에의 자취가 담긴 유적은 사이판 곳곳에 남아 있다. 설탕왕 공원 동상은 그의 생전인 1934년에 세워졌다. 동상 주변에는 원주민인 차모르족 출신 사이판 시장과 후쿠시마(福島)현 아이즈와카마쓰(會津若松)시 일본인 시장이 함께 심은 나무가 서 있다. “아이즈 출신인 마쓰에를 기리기 위해 이 나무를 심으며,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2005년 7월 16일.”
일본인들은 지금도 사이판 곳곳에 그들 각자의 추도 시설을 만들어 어제의 패전을 기억한다. 특히 일본군의 최후 저항이 있었던 만세절벽 인근과 미군이 상륙해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수수페 해안 등지에는 골목마다 일본어가 새겨진 비석과 위패 시설이 발견될 정도다. 사이판 한인회 김재홍 회장은 “신사나 위령비가 매년 꾸준히 늘고 있어 그 수를 파악하기조차 힘들다”고 말했다. 조선인 강제동원을 증언해주는 기념물이 사이판 북쪽 ‘태평양 한국인 추념 평화탑’ 한곳뿐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원폭 탑재지 티니안
마씨가 하루 10시간씩 뙤약볕에서 일한 난요코하츠 직영농장은 사이판 국제공항으로 변했다. 이곳에서 6인승 세스나 경비행기를 타고 남쪽 이웃 섬 티니안(Tinian)으로 향했다. 정글에 파묻힌 티니안 북부 노스필드 지역은 조선인들이 대규모 동원돼 사탕수수를 재배했던 곳이다. 노무자들은 종종 일본 해군 항공부대의 비행장 활주로 건설 인력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역시 전북 장수에서 티니안으로 끌려온 우태현(90) 할아버지는 “소화(昭和) 17년(1942년) 항공대 기지에 있는 목공소로 끌려갔다가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나는 바람에 사탕수수 농장으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전황이 급박해지자 일본군은 조선인 노무자들을 군사시설 건설 현장에 배치하면서 민간인이 아닌 군속으로 신분을 바꿔버렸다.
1944년 7월 사이판을 무너뜨린 미 해병대가 일본군의 옥쇄 작전을 뚫고 티니안에 상륙했다. 미군은 곧바로 대규모 공병대를 투입해 노스필드 지역의 활주로를 기존 1개에서 4개로 늘렸다. 그리곤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한 B-29 폭격기 기지로 만들었다. 최대 항속거리 5000㎞였던 B-29기는 이곳에서 발진해야 2400여㎞ 떨어진 일본까지 왕복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인류 역사를 바꾼 ‘리틀보이’와 ‘팻맨’ 두 개의 원자폭탄이 여기에서 탑재돼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로 향했다. 2차 원폭 투하 6일 만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2차 대전도 끝났다.
정글에서 발견된 유골들
일본군과 미군의 전투를 피해 방공호 안에서 버티던 조선인 노무자들은 광복 후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미군은 조선인, 일본인, 현지인 차모르족을 격리 수용했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1946년 1월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일괄 송환됐다. 미군이 작성한 승선자 명부에 따르면 티니안에서 2584명, 사이판에서 1354명이 귀국했다.
그러나 강제동원의 진짜 비극은 종전 후 30여년이 지나서 밝혀졌다. 1977년 5월 대구대 설립자인 이영식 목사(작고)가 아들인 이태영 당시 대구대 총장(작고) 등과 함께 티니안 밀림 속 옛 민간인 수용소 터 부근에서 조선인 추정 유골 5000여구를 발견했다. 유골이 발견된 곳에는 ‘조선인지묘(朝鮮人之墓)’라고 새겨진 철근콘크리트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출범한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는 사할린을 포함, 태평양 주변 9곳에 추념비를 건립하는 등 강제동원 진상규명 활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99%는 일본인 관광객”
사이판에서 다시 30인승 비행기를 타고 북마리아나제도의 최남단 로타(Rota) 섬으로 향했다. 로타 서남쪽 송송(Songsong) 빌리지 해변에는 난요코하츠의 제당 공장 시설 일부가 남아 있다. 로타 전역 농장에서 거둬들인 사탕수수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철도를 타고 공장으로 보내져 증류 과정을 거친 뒤 정제 설탕으로 태어났다. 이 섬에 거주하는 한인 정석희(67)씨는 “절벽과 해안을 연결하는 사탕수수 운반용 케이블카의 지지대가 남아 있었는데, 몇 년 전 큰 태풍으로 쓰러졌다”고 말했다.
미군은 2차대전 때 로타에 함포 사격을 퍼부었지만 사이판 티니안과 달리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진 않았다. 이 때문에 섬 곳곳에 일제 잔재들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2차대전 당시의 각종 유물을 모아 ‘동굴 뮤지엄’을 운영하고 있는 현지인 마티아스 타이사칸씨는 취재팀에게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좀 몰고 오라”고 했다. 로타를 찾는 여행객의 99%가 전세기를 이용하는 일본인이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이판 방문한 일왕… ‘조선인’엔 침묵
아키히토 일왕 내외는 2005년 6월 북마리아나제도를 공식 방문해 사이판 최북단 만세절벽 앞에 섰다. 일왕의 해외 전몰지 위령 방문은 전후(戰後) 처음이었다. 1944년 벼랑 끝에 몰린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들이 미군의 만류에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바다로 몸을 던진 바로 그 현장을 향해 그는 묵념했다.
“일본인 사망자는 5만5000명에 이르고, 여기엔 어린이를 포함해 1만2000명의 민간인이 포함됐다. 동시에 우리는 3500명가량의 미군과 900명 이상의 섬 주민들이 이 전투에서 제물이 됐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일왕은 사이판 방문차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기 전 이런 내용의 출국사를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일왕은 이곳에 동원됐다 사망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만세절벽에서 돌아가는 길에 위치한 한국인 추념탑 앞 도로에 잠깐 멈춰 서서 머리를 숙인 게 전부였다. 일본 기업의 살인적 강제 노역에, 일본군의 자살 돌격 강요에, 미군의 포격에 억울하게 스러져간 조선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올해 일왕의 방한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 스스로 과거사에 대한 매듭을 지은 뒤에나 이뤄질 일은 아닐지….
사이판·티니안·로타=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