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12) 순창에 이사온 후 남편이 고추장 장사 권유

입력 2010-05-17 17:42


“느그들 인자 고마 순창으로 돌아와 살그라. 아부지 엄니도 가차이서 돌봐 드리고. 느이 서방 일자리는 나가 알아서 헐테니. 동순이 니는 나 사는 것도 좀 돌아보고.”

1982년에 서울 경찰국 특수과장으로 근무했던 친정오빠가 순창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왔다. 오빠는 순창읍내 관사에서 살고, 올케언니는 조카들과 함께 서울에 남았다.

때문에 나더러 읍내 관사에 다니며 살림을 돕고 부모님과도 가까이 살라며 오빠가 순창으로 이사 올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손을 써서 남편을 순창구청으로 발령내 주었다.

그렇게 순창읍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아쉬웠던 것은 정들었던 남원중부교회를 떠나는 일이었다. 교회에 다시 다니기 시작할 때는 남원동부교회에 나갔으나 도중에 한 번 교회를 옮겼다. 이유는 남편이 일하던 사방관리소 소장님이 전주 서문교회 장로님이셨는데, 아는 목사님이 남원에서 교회를 새로 개척하니 그쪽으로 나가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었다. 나는 소장님께 “그 핑계로다가 우리 애들 아부지도 교회 함께 나가게끔 말 좀 잘 혀 주세요”라고 했다.

내 신앙생활을 말리진 않아도 따라 나서지 않던 남편은 직장 상사 부탁을 마다하기 어려웠는지 순순히 “함께 교회 댕길테니 그짝으로 나가자고”라고 했다.

남원동부교회를 찾아가 보니 우리가 첫 성도였다. 아직 교회당도 없이 가정집을 얻어 목사님댁 식구 6명이 달랑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 내외와 목사님 내외가 함께 벽돌을 날라 교회를 지었다. 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 말고도 남원중부교회는 나에게 참 귀한 교회다. 왜냐하면 교회를, 목사님을 섬기는 일의 즐거움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목사님댁이 하도 어렵게 사니까 교회에 갈 때마다 쌀 김치 등을 이고 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차츰 친정에 가서 채소를 얻어와도, 이불이 필요해 사러 가도 사모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어딜 가든 내것 하나 사면 목사님댁 것 하나 사곤 했다. 나도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다.

정이 담뿍 든 교회를 떠나는 발걸음이 쉽지는 않았지만 고향인 순창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에겐 중요한 의미였다.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어도 떠나올 때와 달리 가족들 건사할 만큼은 자립했다는 점도 뿌듯했다. 그동안 알뜰히 살아온 덕에 남편이 남원에서 진 빚은 다 갚았고, 전세금 100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집을 얻어 이사했다.

그때는 네 딸 가운데 셋째까지 태어나 있었다. 남원과 익산에서 하던 것 같은 부업을 다시 할 만큼 어렵지는 않았지만 어려서 어머니에게 늘 들었던 대로 ‘죽으면 썩어질 손, 놀려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집 근처 고추장 만드는 집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나도 본래 어머니에게 잘 배워 고추장을 담그는 법은 훤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일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고추장 된장 장아찌 담그는 일이 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1년쯤 지났을 때 남편이 “이자는 우리끼리 고추장 장사를 혀 보세”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선뜻 자신이 서지 않았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