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지면 광주 쑥밭” 시민군 폭약 뇌관 제거… 프락치 누명

입력 2010-05-16 18:17


재조명되는 ‘최후 희생자’ 문용동 전도사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1980년 5월 27일 새벽 중무장 헬기가 10여m 상공을 선회하던 전남도청 민원실 앞. 격렬한 총격전 속에서도 민원실 지하 무기고를 지키던 문용동(당시 28세)씨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조준사격이 두려웠다. 바닥에 엎드린 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던 문씨는 동이 트고 총성이 잠시 멎자 출입문을 열었다.

“손들고 나갑니다. 쏘지 마세요.” “탕, 탕, 타탕.”

손깍지를 뒷머리에 낀 채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던 문씨는 계엄군이 쏜 3발의 총탄을 상반신에 맞고 고꾸라졌다. ‘5·18 최후의 희생자’이자 ‘유일한 목회자 희생자’였던 문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문씨의 비극은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도청 지하 무기고에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이 있었지만 계엄군이 침투시킨 프락치가 시민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뇌관을 몰래 제거했다’는 소문 속에 ‘프락치’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 정부와 광주시민 어느 편으로부터도 평가받지 못했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그해 5월 18일. 광주 호남신학대 4학년에 다니면서 전남노회 여전도회 파송으로 상무대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던 문씨는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무차별 구타하는 계엄군을 뜯어 말리다가 시민군에 합류했다.

서울경기지구 위수사령부에서 군복무를 했던 문씨가 도청 무기고의 관리책임을 맡은 것은 계엄군이 시민군에 밀려 광주 외곽으로 퇴각한 다음날인 5월 22일. 그는 한 살 터울인 김영복(당시 27·공인중개사·교회 집사)씨, 연하인 양홍범, 박선재씨, 이씨 성을 가진 인천의 한 대학생 등 4명과 함께 무기고 관리를 자청했다. 김씨는 전투공병대 하사관 출신으로 지뢰매설과 뇌관 점화법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문씨는 당시 수거된 소총과 수만 발의 탄약, 수류탄은 물론 전남 화순탄광 한국화약 화약고 등에서 탈취해온 3600여 상자의 폭발물까지 지하에 아무렇게나 쌓이는 것을 보고 돌발적 폭발사고의 위험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이너마이트만 해도 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의 두 배나 되는 가공할 분량이었다(계엄군 작전일지. 5·18기념재단 학술자료).

“담뱃불이 폭약더미에 떨어지거나 총기가 오발되면 반경 3∼4㎞의 광주도심은 쑥밭이 될 겁니다. 폭발물이 1개라도 터진다면 연쇄폭발로 수천, 수만명이 한꺼번에 죽습니다. 무조건 무기를 달라고 협박하는 이들도 늘고 있습니다.”

문씨와 김씨는 오랜 토론 끝에 대참사를 막기로 했다. 두 사람은 24일 오후 도청사수대로 불리던 강경파의 감시를 뚫고 지프차를 타고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내 계엄분소를 찾았다. 계엄사부사령관(소장)과 ‘광주의 대폭발’을 막기 위한 담판을 벌인 이들은 도청에 돌아온 25일 밤부터 26일 새벽에 걸쳐 계엄분소가 보내준 민간인 폭발물 전문가와 함께 뇌관 및 공이를 하나하나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분리한 뇌관과 도화선, 공이 등은 식량창고 쌀통 등에 깊숙이 감췄고 작업을 마친 폭발물 전문가는 빈손으로 비밀리에 도청을 빠져나갔다.

계엄군의 유혈 진압작전 전야인 26일 밤 문씨의 형과 형수, 누나는 두 차례나 도청을 찾아와 “부모님 생각을 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문씨는 “도청 앞 분수대에 놓인 32구의 시신을 봤다. 여기서 죽으나 집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내가 죽는다면 태극기로 덮어 묻어 달라”고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무기고를 함께 지켰던 김씨는 “수류탄 공이 분리는 전문가가 반드시 필요했다”며 “만약 문씨가 프락치였다면 뇌관 제거를 한 뒤 진압작전 이전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5·18 구 묘역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던 문씨의 주검은 다행히 97년 5월 희생자들이 안장된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5·18의 역사 속에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효심이 깊던 아들의 비보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 순봉씨는 10여년간 술로 시름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무원이던 형은 정권을 잡은 신군부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해 직장을 그만뒀고 여동생은 정신분열로 지금까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문씨의 모교인 호남신학대에서도 ‘문용동’이란 이름 석자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금기어’였다. 하지만 95년 5·18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세인들에게 짓밟히던 문씨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 동문들 사이에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매도 일색이었던 그의 결단에 대해서도 5·18 대동정신을 살린 옳은 선택이었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대학 원우회장 정회억(44·신창제일교회 목사)씨 등은 우여곡절 끝에 2001년 5월 교정 한편에 아담한 추모비를 세웠다.

호남신학대는 5·18 30주년이 되는 18일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기독교 예장통합총회 인권위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문용동 순교기념 예배와 제1회 문용동 장학금 수여식을 갖는다. 차종순 총장은 “2000년 명예졸업장을 받은 문 전도사는 광주시민의 안전을 지킨 오월의 작은 예수였다”며 “2007년 발족한 문용동기념사업회와 더불어 작은 기념관을 건립하는 방안을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용동 전도사는… 고2때 신앙생활 시작 교회 야학교사 봉사도

문용동 전도사는 52년 전남 영암 군서면에서 태어나 65년 광주로 이사했다. 조대부고 2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광주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얼마 후 부흥회 강사로 온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에 눈을 떴다.

교회 성경구락부에서 청소년 야학교사로 봉사하고 대학 문학동아리 활동을 주도했다. 당시 교회 신자와 친구들은 그를 온순하지만 강직했던 청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학동기로 당시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했던 이명섭(58) 광주 다운교회 목사는 “문씨는 어려운 형편에도 야학 청소년들에게 지갑을 털어 용돈을 줄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며 “숨지기 이틀 전에도 부상자를 부축하고 병원을 찾아왔었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