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11) 나를 부엌데기로만 알던 아버지가…
입력 2010-05-16 17:59
“동순아, 야야, 말 좀 혀 봐라. 참말로 니가 쌀 푸대 돌라간(훔쳐간) 거여? 아니제?”
친정집 벼 탈곡하는 날, 사람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몰래 쌀 한 자루를 훔쳐낸 날로부터 얼마 후 친정집에 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급기야 어머니는 식구들이 다 있는 앞에서 나를 추궁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모두 오해라는 생각에,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아버지가 나를 더 안 좋게 보실까봐 걱정돼서 물으신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쌀을 훔쳐낸 나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점점 나를 조여왔다. ‘잘못했다고 할까, 한번만 봐달라고 할까, 아니면 뭘 그런 걸 가지고 난리냐고 역정을 낼까’ 궁리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문을 벌컥 열고 나오셨다. “내가 가져가라고 줬다! 누가 도둑질했다고 씨부리더냐. 한번만 더 그딴 소리 혀 봐, 주댕이를 쪄불랑게!”
그 때까지였다. 나를 구박덩이, 부엌데기로만 여기는 아버지라고, 하나도 해 준 것 없는 아버지라고 원망하던 마음은 그날로 풀렸다. 나도 아버지의 귀한 자식이란 것을 그 이후로는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그쯤부터 친정과 빈번하게 왕래하고, 추수하면 친정에서 쌀도 보내주고 하면서 조금씩 살림살이가 안정돼 갔다. 남편도 다행히 임시직 공무원으로 꾸준히 일하면서 월급을 받아왔다.
물론 줄줄이 태어난 딸들 먹이고 입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었다.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파출부, 뜨개질, 밤 깎기도 했고, 화장품 외판원도 해봤다. 애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업고, 화장품 가방 멘 채 아지랑이 피는 거리를 허덕이며 걸어가던 어느 여름날을 떠올리면, 어떻게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아득해진다.
그래도 남에게 진 빚은 어김없이 갚았다.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애들 키우고, 조금씩 돈 모아서 전셋집으로 이사 가고, 그런 재미로 살았다. 남편이 익산시청 수도과 임시직으로 들어가 익산에서 2년간 살다가 다시 남원으로 돌아와 1년쯤 됐을 때였다.
남편이 그날따라 늦는다 했더니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택시 기사인데 소매 언저리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 댁 아저씨가…”하고 말문을 여는데 나도 모르게 “죽었대요, 살았대요?”하고 물었다.
“살기야 살았지요.” 이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며 속으로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도 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승합차에 치였다고 했다. 뺑소니였다. 머리와 팔에 상처를 입어 피를 많이 흘렸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남편을 싣고 와 준 택시 기사에게 뺑소니차를 봤느냐고 물었다. “글씨…. 다른 건 못 보고 교회차든디.”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곧 “어차피 못 찾을 텐데 그냥 놔둡시다”라고 말해버렸다. 그날 밤에 꿈을 꿨다. 골목 끝에 점집이 있었는데 마귀들이 모여 난리굿을 피고 있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소리치니 주변이 꽃밭으로 바뀌었다.
남편은 얼마간 입원해 있다 별 후유증 없이 회복해 퇴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친정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창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