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메 피해자·히키코모리… 병든 일본 사회를 거부하다

입력 2010-05-16 17:28


日 극사실주의 작가 히라타의 ‘잠 못드는 밤은 없다’

말레이시아의 한 리조트. 여타 동남아 리조트가 그렇듯 이 곳에도 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다. 항상 예의바르고 웃는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 아시아 1등 국민이라는 자부심도 가득하다. 적어도 그래 보인다.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때까진.

일본의 전형적인 중년 여성인 치츠코는 사업을 하는 남편과 이곳에 머물고 있다. 남편은 잦은 출장에다 나비 채집에 빠져서 거의 집을 비우다시피 한다.

치츠코에게 손님이 찾아온다. 은퇴이민을 꿈꾸고 있는 친구 부부였다. 친구는 선물이라고 일본에서 사온 풍선껌을 건넨다. “너 껌 씹는 거 좋아했잖아.” 치츠코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녀는 껌을 좋아하지 않는다. 치츠코는 어릴 때 친구들의 껌 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애들하고 어울릴 수가 없었으니까.” 치츠코는 이지메(집단 따돌림)을 당했던 것이었다. 친구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추억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숨을 쉬며 아픈 과거를 읊조리는 그는 친구부부가 이곳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어딜가도 따라온단 말이야. 도대체 일본인.” 친구 앞에선 상냥한 미소로 일관했지만 치츠코는 분노에 가득차 있다.

이지메를 당했던 치츠코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였던 하라구치와 서로 통한다. 하라구치는 리조트에서 일본 DVD를 구해주는 등 필요한 건 뭐든 구해주는 일종의 심부름센터 같은 노릇을 한다. 하라구치는 일본에 있을 때 학교도 안 가고 히키코모리로 살았다. 그런 그가 여기서는 외부와의 소통을 돕고 있다.

일본 사회가 그를 방안에 감금했던 건지, 아니면 그가 여기에 와서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켄이치와 아키라는 소토코모리(물가가 낮은 외국에 장기체류하는 사람)다. 아키라의 아버지는 2차 대전 때 은륜부대(동남아전선에서 운용됐던 일본 보병부대의 통칭)에 징병당했다가 전사했다. 어딘가 아버지의 유골이 묻혀 있는 이곳에서 그는 혼자 산다. “일본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요. 청결하고 차분하고 살기 편한. 그런데 싫어요. 잘 모르겠어요. 이유는. 일본하고는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다고 할까.”

병을 앓고 있는 켄이치도 마찬가지다. 병을 알게 된 두 딸이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다. 여기 있고 싶다.” 2차대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일본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단카이 세대’인 그들에게 일본은 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고국이 아니다.

연극 ‘잠 못드는 밤은 없다’는 이렇게 현재 일본인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빠르고 높은 경제 성장을 이뤄냈지만 이지메, 히키코모리, 소토코모리 등 각종 사회 병리현상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작품은 일본의 사회 병리 현상과 인간의 고독을 이야기한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 일본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일본의 극사실주의 작가 히라타 오리자가 극을 썼다.

연출은 빠른 전개와 사실적인 무대를 선보이는 박근형 연출이 맡았다. 6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다(02-708-5001).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