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시각장애인도 국선변호인 선정해줘야”

입력 2010-05-14 18:34

경기도 성남시 정자동에서 마사지 업소를 운영하던 정모씨는 2급 시각장애인이다.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아 인쇄물을 거의 볼 수 없는 상태다. 정씨는 중국인을 고용해 업소를 운영했다. 방문취업 자격으로 입국한 중국인은 마사지 업소에 취업할 수 없다. 정씨는 중국인 4명을 입국 목적과 달리 고용한 혐의(출입국관리법 위반)로 기소됐다.

1심 재판 과정에서 정씨는 점자로 된 공판조서를 통해 재판에서 자신의 진술 등을 정확히 확인하고 싶었으나 변호인이 없어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결국 1심 재판부는 정씨에게 벌금 400만원을 선고했다. 정씨는 항소했으나 2심 재판부 역시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씨는 시각장애인임에도 점자 자료로 작성된 소송 관련 서류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며 재판청구권이 침해됐다는 취지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 1부(주심 이홍훈 대법관)는 안마시술소 운영 과정에서 취업 자격이 없는 외국인을 고용한 혐의로 기소된 정씨에게 벌금 4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뒤집고 사건을 수원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고 14일 밝혔다.

재판부는 “시각장애가 있는 피고인은 공판조서 등을 확인하지 못해 재판 과정에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피고인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선변호인을 선정해 방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 33조는 법원이 직권으로 국선변호인을 선정할 수 있는 경우로 구속 기소된 피의자, 미성년자, 70세 이상 노령자, 농아자, 심신장애의심자 등을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형사소송법상 시각장애인은 국선변호인을 의무적으로 선정해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며 “하지만 이번 판결로 시각장애인을 비롯, 재판을 받기 어려운 피고인에게 국선변호인을 반드시 선정해 방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판례가 성립됐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