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선교하는 교회’ 다짐 서울 성약교회 김달수 목사
입력 2010-05-14 16:58
필리핀 근교 까비트대학교. 대학이라고 하지만 학교 앞은 황량하리만치 갖춘 게 없다. 마닐라 시내에서 2시간 거리인 이곳은 필리핀 사람들조차 잘 모를 정도다. 대학생들은 주로 농촌 출신이다.
지난 3월 이곳엔 홀리그레이스교회 입당예배가 열렸다. 서울 청룡동 성약교회 김달수(70) 목사는 이곳을 ‘제2의 휘튼대학’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미국 시카고의 휘튼대는 빌리 그레이엄 등 굵직한 복음주의자들을 배출한 미션스쿨이다. 김 목사는 “매년 20명씩 훈련해서 10년간 대학에 들여보낸다면 그 학교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26명이 한꺼번에 합숙 훈련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내년 12월 은퇴하는 김 목사는 교회 형편상 한꺼번에 퇴직금을 받을 수 없어 2년에 한 번씩 중간정산금을 받는다. 교회 설립에 쏟아부은 1억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올해도 중간정산금을 받는 해다. 그 교회를 위해 쓸 생각에 김 목사의 마음은 벌써부터 흐뭇해지지만 혹시나 교회 성도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도 든다. 김 목사가 중간정산금을 선교에 쓴 것을 알면 성도들이 아예 ‘딴 곳’에 돈을 못 쓰도록 퇴직 이후에 돈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37년간 성약교회를 목회하면서 김 목사는 늘 이런 식으로 선교를 해왔다.
원래 선교사를 꿈꿨던 김 목사가 목회를 하게 된 건 가족들 때문이다. 아내와 갓난아기, 거기다 어머니와 동생 3명 등 딸린 가족이 많다는 이유로 선교 대신 목회를 권유받은 것이다. 선교사의 꿈을 접는 대신 그는 ‘선교지보다 더 어려운 국내지역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1973년 8월, 철거민들이 서울 시내에서 청룡동(당시는 봉천동)으로 쫓기다시피 들어올 때 김 목사도 따라 들어왔다. 김 목사는 ‘기도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배웠다고 한다. 이곳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밤낮 이웃끼리 서로 땅을 차지하겠다고 싸움을 했다.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 김 목사도 개척 3년간 수제비 죽을 먹은 기억밖에 없다.
남의 집 옥상을 빌려 텐트를 치고 목회했지만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지금까지 동남아는 물론 남미, 중앙아시아 등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렇다고 성약교회 이름을 내세우진 않는다. 단독 파송보다는 여러 교회가 협력해서 파송한다는 정신으로 78년부터 몇몇 목회자들과 함께 자생 선교단체를 만들어 파트너십 선교를 해오고 있다.
김 목사의 목양실은 교회 모퉁이를 돌아 구석진 곳에 있다. 손님이 오면 손수 차를 타서 대접한다. 이동할 때도 직접 차를 운전한다. 그의 목회철학은 ‘목회자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이다. “목회자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목회자는 더 이상 목회자가 아니죠.” 헌신적인 선교의 배경을 묻자 “선교는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김성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