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유통사 무덤’ 한국에… 英 데벤함스 상륙한다

입력 2010-05-13 18:35


‘글로벌 유통기업의 무덤’으로 통하는 한국에 영국 패션·유통기업 데벤함스(Debenhams)가 백화점을 연다. 외국계 백화점이 한국에 진출하는 것은 2000년 프랑스 쁘렝땅 백화점 철수 이후 처음이다. 1996년 국내 유통시장 개방 후 월마트와 까르푸 등 세계 1, 2위 유통기업들이 국내 시장에 대거 진출했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돌아갔다.

이들은 선진화만 앞세웠을 뿐 ‘한국적 정서’를 토대로 ‘한국화’를 소홀히 한 점이 주된 실패 이유로 꼽힌다. 데벤함스 진출이 주목받는 이유다.

데벤함스는 13일 서울 논현동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에서 국내 기업인 ㈜데벤과 국내 백화점 사업에 대한 파트너십 협정 조인식을 가졌다. 1778년 설립된 데벤함스는 영국 및 아일랜드에 155개, 기타 18개국에 56개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다. 영국 내에서 20%대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파이낸셜타임스(FT)지수 250대 기업이다.

데벤함스는 ‘독자 브랜드’와 ‘경쟁력 있는 가격’을 바탕으로 국내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데벤함스 백화점은 영국 왕립 디자이너를 지낸 베티 잭슨을 비롯해 줄리안 맥도날드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단독 상품을 취급하는 등 패션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도 고품질의 제품을 비슷한 수준의 해외 브랜드보다 30% 이상 저렴하게 판매할 계획이다.

정관수 데벤 대표는 “전국적으로 15개의 백화점을 운영할 계획”이라며 “취급 제품의 70%를 자체브랜드 의류를 포함한 직매입 형태로 조달해 유통비용을 줄여 기존 백화점보다 30∼40% 저렴하게 판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거 ‘현지화’에 실패한 글로벌 유통기업들의 사례를 떠올리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월마트는 1998년 국내에 16개 매장을 열면서 단숨에 한국 유통업계 5위로 부상했다. 하지만 한국 소비자의 마음을 읽지 못해 결국 실패했다. 한국 소비자들은 한 번에 물건을 대량 구매하는 것보다 꼼꼼히 비교하고 고르는 것을 좋아했다. 물건값에 크게 민감하지 않았고 주 고객인 여성들은 백화점처럼 편안한 구매환경을 선호했다.

하지만 월마트는 ‘싸게만 팔면 된다’는 일념으로 창고를 연상시키는 매장에서 5∼6m 선반에 물품을 쌓아놓고 팔았고 채소나 생선 등 관리비용이 많이 드는 신선식품은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2004년부터 적자가 나기 시작해 2005년에는 적자액이 104억원에 달했다.

까르푸도 비슷했다. 프랑스식 관리를 과신했던 까르푸는 사장과 임원, 점장까지 프랑스인 일색으로 채웠다. 임원급은 외국인, 직원은 한국인이라는 기형적 인력 배치는 조직융화에 걸림돌이 됐다. 두 업체 모두 세계시장에서 통했던 방식을 한국에서 그대로 고집하다 결국 두 손 들고 나간 것이다.

1988년엔 대구 동아백화점이 프랑스 쁘렝땅그룹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백화점을 운영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2000년 철수했다.

데벤함스는 과거 유통업체들의 실패사례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자부한다. 박득승 부사장은 “쁘렝땅백화점은 이름만 빌려왔을 뿐 당시 프랑스 본사에서 판매하는 제품 등은 전혀 취급하지 않았다”며 “영국 본사의 100년 이상 된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해 업계 판도를 바꿔놓겠다”고 말했다. 데벤함스는 올 연말에 강남과 강북 각 1곳과 울산·창원, 부산 등 총 4개 매장을 오픈할 계획이다.

국내 업체들은 그다지 긴장하지 않는 분위기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국내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워낙 높고 백화점 수준도 많이 올라간 상태라 시장 공략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고객들의 소비성향과 입점 지역의 특성 등을 파악해 상품구성, 인테리어, 서비스를 차별화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