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10) 가장 힘들 때 예수님 생각… 아기 업고 교회 출석

입력 2010-05-13 21:07


큰딸 은영이를 낳고 사흘 만에 일어나 살림을 돌보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났을 때였다. 기저귀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 들어왔다. 앞집 새댁이 나보다 딱 1주일 늦게 딸을 낳았는데, 나더러 월 5000원을 받고 그 집 살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딴에는 내가 기왕에 기저귀 빨래를 하고 있으니 같이 맡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벌이가 거의 없던 터라 두 번 생각도 않고 좋다고 했다.

그날부터 바로 앞집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기저귀며 산모 빨래를 우리 집 것보다 몇 배 힘을 줘서 빨고, 삶고, 청소하고 미역국을 끓이다 보니 문득 기가 막혔다. 나 자신도 몸을 푼 지 고작 1주일인데 다른 산모를 수발하는 처지가 한심하고도 서글펐다.

그간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연탄불 한번 못 때고 겨울을 났어도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이 때의 슬픔은 전에 느꼈던 것과 달랐다. 마음이 마르고 말라 물기라곤 전혀 없는 사막처럼 팍팍해져 있었다. 그런데 고마운 건 그렇게 가장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싶은 바로 그 순간 예수님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아, 교회에 가야겠다!”

어쩌면 내가 그 때를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 없이 살았던 마지막 시기여서인지도 모른다. 그 후 교회에 다니고 다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뒤로는 더 어렵고 배고파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주님 붙들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같은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교회 집사님을 찾아갔다. 남원동부교회 구역장이고 전도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는데 이상하게 나보고는 한번도 교회에 가자고 하신 적이 없었다. 먼저 찾아가서 “다음주부터 나도 교회 나갈라니까 데불고 가시오” 했다. 갓난아기를 업고 그렇게 다시 교회에 다니게 됐다.

세상에 혼자라고, 남편도 기댈 수 없고 오로지 나 혼자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건만, 그 덕에 교회 간다고 당당하게 나서도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껏 교회 다니게 해주세요”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기도는 이 때 이미 이뤄진 것이었다.

그 후로도 물론 생활은 어려웠다. 한 번은 집에 쌀이 똑 떨어져서 고민하던 차에 친정집에서는 한참 논에 나락 훑을(탈곡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를 업고 찾아가 “일손 모자랠깨비…”하며 은근슬쩍 사람들 틈에 끼어 일을 도왔다. 그리고는 사람들 눈을 피해 마당에 널려 있는 나락을 자루에 쓸어 담았다. 세 자루를 가득 담은 뒤 근처 방앗간으로 가져갔다. “우리 식구들 모르게 좀 찧어주소. 서로 손해 볼 것 없응게”라는 내 말에 그 집 주인은 금세 뜻을 알아차렸다. 좀 덜어내는 조건으로 입을 다물어달라는 뜻 말이다. 한참 뒤에 가지러 가니 찧은 쌀을 겨우 한 자루 돌려줬다. 그러나 싫은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부리나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친정집 쌀을 훔친 것이다.

비어 있던 쌀독에 쌀을 부으니 거의 입구까지 올라왔다. 그 행복감이란. 대한민국 부자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역시나 사단이 났다. 누군가 내가 쌀자루를 들고 버스 타는 장면을 본 것이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