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동항 모텔촌에 러시아사람 왜그리 많댜?

입력 2010-05-13 17:34


나로호 기술진 모여 있는 ‘러시아 특구’ 가보니

어둠이 내린 지난 3일 오후 8시.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 선착장 앞에 있는 모텔에서 수십명의 이방인이 무리지어 나왔다. 머리카락은 노랗고 눈은 파랗다. 노동자로는 보이지 않는 말쑥한 차림.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백인들은 이미 삼삼오오 동네를 거닐고 있다. 한반도 최남단 해남 땅끝마을에서 20㎞ 남짓 떨어진 벽촌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이들이 누구인지, 답은 다음 퍼즐에 있다. ①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나로우주센터는 고흥군 봉래면 외나로도에 있다. ②외나로도는 녹동항에서 차로 40분 거리다. ③다음달 9일 한국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의 2차 발사가 실시될 예정이다.

100여명의 장기 투숙객

고흥군에 다시 러시아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4월 초. 지난해 8월 25일 목표궤도 진입에 실패한 나로호의 두 번째 발사를 담당할 기술진이다. 선발대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 이들을 맞는 항우연은 지난해와 같은 고민을 했다. 어디서 재우고 뭘 먹일 것인가.

나로우주센터에 숙소동이 하나 있지만 상주 인력 70여명 몫이다. 고흥에 호텔은 도화면 빅토리아호텔 하나다. 일단 이곳에 50여명 묵을 숙소를 잡았다. 외나로도 근처엔 모텔도 없다. 면적 776㎢ 고흥군을 샅샅이 훑은 항우연은 결국 지난해처럼 나머지 인원을 녹동항 모텔촌에 재우기로 했다.

선착장 앞에 나란히 자리한 BMW, 라바, 스카이 등 모텔 3곳. 다른 곳보다 비교적 깨끗하고, 모텔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의 경치도 아름답다. 외나로도까지 가는 길도 나쁘지 않다. 77번 국도를 타고 가면 된다.

모텔 근처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윤철(51)씨는 “고흥의 다른 모텔촌에선 외나로도 가려면 구불구불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선 일직선 도로로 달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기술자들은 세 모텔에 대략 15명씩 나눠 투숙했다.

‘장기 투숙객’들이 들이닥친 뒤로 모텔 주인들은 울상이다. ‘쉬었다 가는’ 손님을 받을 수 없기 때문. 한 주인은 “오래 머물게 해준다고 돈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방을 돌리질 못하니 남는 게 없다”고 했다.

모텔 인근 편의점도 별로 득 본 게 없다고 한다. 김윤철씨는 “여행 온 내국인 손님보다 씀씀이가 작다”고 했다. ‘러시아 특수’를 즐기는 건 식당이다. 항우연은 러시아 기술진 식사를 위해 녹동항 식당 3곳과 계약을 맺었다. 모텔 하나에 식당 하나씩이다.

식당은 대박… 양식 요리사도 고용

4일 오전 7시, 선착장 맞은편 대진식당은 분주했다. 앉은뱅이 탁자가 있던 자리엔 의자와 식탁이 놓여 있다. 라바 모텔에 머무는 러시아 기술자 15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메뉴는 북어국, 밥, 김치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이다.

식당 주인 이금심(59·여)씨는 “지난해 러시아 손님 받느라고 테이블 포크 칼을 다 샀는데 2년째 한국에 와서 그런지 입맛이 변한 것 같다. 지금은 밥도 잘 먹고 ‘김치 최고’ 하면서 김치도 찾는다”고 전했다.

동네 빵집에 러시아인이 즐겨 먹는다는 호밀빵을 만들어달라고 특별 주문해 식탁에 올리기도 했지만 “한국의 빵이 더 맛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만두기도 했다.

10m 떨어진 국밥집 별난국밥도 앉은뱅이 탁자를 치우고 의자와 식탁을 놓았다. 이날 식탁엔 빵과 샐러드, 시리얼, 요구르트, 우유가 놓여 있었다. 스카이 모텔의 러시아인 14명이 이곳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저녁에는 스테이크, 돈가스, 생선 튀김, 훈제 연어 등이 제공된다.

별난국밥은 러시아인들을 위해 양식 요리사까지 석 달간 고용했다. 주인 황효자(55·여)씨는 “메뉴판에 있는 국밥 사진 가리키면서 달라기에 해줬더니 좋아해요. 생고기 두루치기, 카레라이스도 잘 먹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곳에 양식 요리사를 데려오려면 월급을 최소 300만원은 줘야 한다. 숙식 제공도 기본이다. 그 이상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인근 상인들에 따르면 러시아 기술진 식대는 1인당 하루 4만5000원쯤 된다. 15명 식사만 준비해도 하루 매출이 약 70만원이다. 월 2000만원의 매상을 올리는 셈이다.

한 상인은 “지난해에는 한 식당이 거의 혼자 식사 준비를 도맡았는데 수억원 벌었대요. 빚 때문에 식당 문 닫을 뻔했는데 단번에 살아났죠. 올해는 고흥군에서 ‘한 곳만 벌게 하지 말고 여러 식당에 나눠달라’고 항우연에 협조를 구했다더군요”라고 전했다.

시골 마을 벽안의 러시아인

녹동항 세 모텔에 묵고 있는 러시아인은 45명이다. 빅토리아호텔 투숙자까지 합하면 100명이 넘는다. 이들은 매주 금요일 고흥읍에 있는 농협 고흥군지부를 찾는다. 고흥군의 제1금융권은 농협과 광주은행뿐인데, 농협이 광주은행보다 규모가 크다.

주로 쇼핑을 위해 달러를 원화로 바꾼다. 농협 관계자는 “버스 4대 정도에 나눠 타고 와서 한국 돈으로 바꾼 뒤 읍내 마트에서 쇼핑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기술 유출 우려로 이들에 대한 보안은 철저하다고 했다. 항우연 측은 “러시아 정부에서 파견된 보안담당관이 붙어 다니며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접근은 어렵지 않았다. 쉽게 말을 건넬 수 있었고 특별히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영어를 못해 깊은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외엔.

“주말에는 하루 종일 자거나 항우연이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광주, 순천으로 쇼핑가요. 자기들끼리 콜택시 불러 교외 식당에 가서 백숙이랑 막걸리를 먹고 오기도 하죠.” 상인들 말을 들어보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

장기 체류여서 항우연은 만일의 안전사고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 지난해엔 러시아 기술자 한 명이 만취 상태로 난동을 피워 조기귀국 당했다. 올해도 술 문제로 한 명이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편의점 김씨는 “(러시아 손님들은) 아침에도 커피 마시듯 맥주를 마신다”고 말했다.

2년째 러시아 기술진을 맞다보니 이곳 주민들은 나로호에 관한 한 준전문가급이다.

“지금 들어오는 러시아인 숫자를 보니까 6월 9일 발사하기는 아마 어려울 거야. 한 달 남았는데, 이맘때쯤이면 지난해처럼 추가 인력을 포함해 150명쯤 와야 하거든. (항우연이) 19일까지는 쏘겠다고 했으니 아마 19일쯤 쏠 거야.” 숙식과 식사제공을 위해 날짜별로 조금씩 달라지는 러시아 기술진 명단을 갖고 있는 한 상인의 말이다.

고흥=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