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 지휘자 정치 컨설턴트의 세계

입력 2010-05-13 18:00


‘알파독’ 제임스 하딩/부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캠프의 두뇌전이 치열하다. 선거는 정치 컨설턴트가 감독을 맡고 각 후보들을 주연으로 해 제작되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알파독(Alphadogs)-그들은 어떻게 전세계 선거판을 장악했는가?’는 선거를 진두지휘하는 정치 컨설턴트의 세계를 보여준다.

저자 제임스 하딩은 현재 ‘타임스’ 편집국장으로 재직중인 영국 저널리스트다. 하딩은 정치 컨설턴트를 한 무리의 개들 가운데 수장을 뜻하는 ‘알파독’이라고 일컫는다. 하딩은 세계적인 정치 컨설팅 업체 ‘소여 밀러 그룹’을 수백 번의 인터뷰와 꼼꼼한 취재로 파헤쳐 선거판의 역동성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소여 밀러 그룹’의 주축은 데이비드 소여와 스콧 밀러다. 소여는 기록영화를 만들다가 1960년대 정치인들의 의뢰를 받아 선거 영화를 제작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놨다. 스콧 밀러는 ‘코카콜라와 함께 웃어요’라는 유명한 문구를 만든 광고 카피라이터였다. 그는 1975년 소여의 제안으로 정치 컨설턴트의 세계로 뛰어든다.

둘의 공동작품은 78년에 치러진 케빈 화이트 보스턴 시장의 선거 운동이다. 당시 화이트는 상대 후보보다 여론 지지율에서 26%나 뒤져있었다. 사람들은 화이트를 오만한 계파 정치의 우두머리라고 여겼다. 이에 ‘소여 밀러’는 화이트의 단점이 시장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장점이라고 부각했다. 반면 상대 후보인 조 티밀티는 사람은 좋지만 경륜이 부족한 인물로 규정했다.

‘네거티브 전술’은 먹혀들었다. 동시에 화이트를 ‘도시와 사랑에 빠진 고독한 남자’로 포장하는 이미지 전술도 펼쳤다. 덕분에 화이트는 보스턴을 사랑하고 약점을 가진 한 인간으로 그려졌고, 시민들은 화이트에게 보스턴의 시장직을 안겨주었다.

소여 밀러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86년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후보의 선거였다. 당시 미국의 영향권에 놓여있던 필리핀의 특성 상 국내 선거는 미국의 막후 선거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를 착안해 ‘소여 밀러’는 미국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일명 ‘백보드샷’ 전술을 구사했다. 상대 후보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미국 언론에 흘리면 필리핀 언론은 이를 받아썼다. 이 과정에서 국내 언론은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아키노 선거 본부의 주장을 인용 보도하게 됐고, 자연히 아키노 본부의 입장이 언론에 실리는 횟수가 늘어갔다.

또한 ‘소여 밀러’는 아키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워싱턴의 동향에도 귀를 쫑긋 세웠다. CIA의 인맥을 이용해 레이건의 마음을 샀고, 아키노는 필리핀과 미국에서 인정받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은 88년 칠레에서도 독재자를 축출하고 민주주의를 들여놨다. 당시 독재자 피노체트는 8년 연임의 야욕을 보였다. 하지만 야당은 분열한 상태였고 국민들은 독재자의 부재가 두려웠다. ‘소여 밀러’는 국내 분위기를 간파하고 선거를 ‘미래를 위한 행복한 축제’로 규정했다. 즉 부담스러운 현재의 상황을 상기시키기보다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이었다.

광고는 이를 잘 구현해냈다. 아이들이 밝게 뛰어놀다가 연을 날린다. 그 연에는 ‘NO’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다. 밝으면서 희망찬 광고는 ‘행복해지려면 반대표를 던지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덕분에 피노체트의 8년 연임은 무산됐고 ‘소여 밀러’는 민주화의 투사로서 명성을 높였다.

‘소여 밀러’가 남미와 미국에서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97년, 오랜 기다림 끝에 대권을 거머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다. 86년 필리핀의 피플파워 혁명 때부터 맺어온 인연은 이어졌다. 번번이 낙선하는 김 전 대통령을 ‘소여 밀러’는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92년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선언을 용감하고 격조 높은 행동으로 판단했고, 앞으로 더 큰 문이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소여 밀러는 95년부터 김 전 대통령을 인내심이 강한 민주화 투사로 부각시키며 정계복귀에 대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97년 대통령 당선으로 맺어졌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