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패장에 대한 규율

입력 2010-05-12 21:18


임진왜란 개전을 앞둔 선조 20년(1587년). 선조는 음력 3월 28일 전라좌수영을 발칵 뒤집어놓는 어명을 하달했다. 서·남해 바다를 책임지고 있는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을 참수하라는 내용이었다. 선조실록이 기록한 어명은 다음과 같다.

“패군(敗軍)한 장수에게는 자연 그 형률이 있다. 전투에 졌는데도 즉시 법을 시행하지 않고 국가를 다스릴 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춘추 시대에 초나라만 유독 강국이었는데, 이는 전투에 패한 장수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대에 걸쳐 조금이나마 생기(生氣)가 있던 시대에는 대개 이런 방식을 적용했다. 지금 심암의 나약하고 비겁했던 그 꼴이야 족히 다시 들어서 책망할 것도 없다. 그러나 적과 대전하면서 장사(將士)를 천여 명이나 잃었건만 왜적의 머리 하나 참획하지 못했으니 다시 힐문할 것도 없고 의당 참수(斬首)해 조리를 돌려야(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변방의 백성들에게 사죄하고 장사들을 북돋우는 것이 이 일에 달렸다.”(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발췌)

이 어명은 왜구가 남해의 한 섬을 내습했으나 전라좌수사 심암이 대응을 잘못해 병사들이 숨지고, 전선 1척이 포획된 일이 발생하자 선조가 격노해 내린 명이다. 이런 엄격한 규율 적용은 당시 조선의 전군에 공통된 것이었다. 군 통수권자인 왕이 북쪽 의주로 도망다니던 시절에 저 아래, 남해의 조선 수군이 와해되지 않고 왜구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 역시 전란 중임에도 엄격한 군율 적용에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안함 영결식이 잘 마무리됐다. 영령들을 잘 보내고 원인규명이 우선순위라는 논리에 문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어쩌다 그런 목소리가 나오면 “군을 다독여야 할 때다”, “북한만 좋게 하고 군과 국민을 이간시키는 일이다”는 주장으로 말문을 닫게 했다.

그러나 이제 우선순위들이 잘 갈무리됐다. 늦었지만 아주 엄격한 잣대로 잘잘못을 따져 적절히 처분할 때가 왔다.

천안함 사건은 한나라당 지도부 등 여권 고위인사들과 군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주적에 의한 아군 전투함 침몰 사건’으로 규정돼가고 있다. 그 결과로 전사자 46명에, 전투함 1척이 소실됐다. 인명 손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군이 가진 전투함이 수백t 규모 작은 함선까지 모두 합해 140척인 점을 감안하면 최일선에 배치됐던 1200t급 전투함 1척의 손실은 결코 작지 않다. 국민들은 술자리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고 침통해하고 있다.

전후사정이 이러함에도 아직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청와대와 유관 기관의 안보 및 정보 라인선상의 인사들이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핵심 지휘선상에 있는 인사들도 여전히 지휘봉을 쥐고 있다. 오히려 일부 인사들은 국회 상임위에 출석해 의원들이 “안보가 엉망이다”고 지적하자 되레 큰소리로 맞받아치는 풍경도 벌어졌다.

국군통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되고 있어 그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벌어진 결과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책임선상에 있는 인사들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감사 결과를 추후 반영해도 늦지 않다. 이렇게 해야 현재의 허술해진 군기를 새로이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미래의 전투태세를 빈틈없이 갖출 수 있다.

음참마속이 필요한 때, 조치가 늦어지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경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특히 군기 문제에 있어선 더욱 그렇다.

가장 최신판인 2008년 국방백서 ‘군비태세’ 항목에서 국방부는 “우리 군은 북한은 물론 모든 스펙트럼의 위협에 대비할 능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북한을 포함해 24시간 감시 및 조기경보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전에 안보위협 징후를 식별해 실시간 전파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안보 문제에 있어 말 따로, 행동 따로여서는 안 된다.

손병호 정치부 차장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