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9) 결혼 첫 날 신혼집 가니 빚쟁이가 맞아

입력 2010-05-12 17:26


1975년 겨울, 결혼식을 마치고 남편과 남원으로 향하며 “이자부터 우리 힘으로 잘 살아봅시다. 성실하게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안 오겄는가” 하며 손을 맞잡고 다짐을 했는데, 방에 딱 들어서니 웬 아저씨가 일곱 살쯤 된 남자아이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첫마디가 “돈부터 내놓으시오!”였다. “무슨 돈요?” “댁네 남편이 이 동네 살면서 갖다 먹은 보리쌀 값이오!”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 얼굴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남의 방에 막무가내로 들어와 계시면 어쩐다요? 지금은 없응게 다음에 오시쇼.” “그렇게는 못 허지. 들어보니 순창에 좀 산다 허는 집 딸내미 얻어서 결혼했다고 허든디. 살만 혀졌으면 너므 돈부터 갚는 것이 순서 아니당가!”

나는 기가 차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모릉게 알아서들 하시오” 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 들어가고 버티고 있으니 제풀에 지쳤는지 아저씨는 “갚나 안 갚나 내 두고 볼텡게!” 하며 아들 손을 잡고 돌아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며칠간 빚쟁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남편이 총각 시절에 그 고장에서 이장을 한다며 진 빚은 무려 50만원이 넘었다. 집 한 채 값이었다. 예물이라고 해 준 반지와 한복 값도 여기 고스란히 포함돼 있었다.

남편은 빚쟁이들 등쌀에 집에도 잘 들어오지 못할 정도였다. 어쩌다 남편과 마주앉게 된 날, 나는 벼르던 말을 했다. “여보, 우리 장사를 헙시다.” “장사? 무슨 장사? 나는 장사는 한 번도 안 혀 봤는디.” “못 허는 게 어디 있소. 목구멍에 풀칠을 하려면 뭐라도 허는 것이지.” “그럼 무슨 장사를 헌당가?”

다음날로 우리는 장에 가서 생 명태 두 짝을 사고 리어카를 얻어 왔다. 그리고 남편은 사촌 형과 둘이서 리어카에 생선을 싣고 광한루를 한 바퀴 빙 돌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한 마리도 안 팔리네” 하는 것이었다. “이리 줘 봐요. 차라리 내가 팔지!” 집 앞에 명태를 널어놓고 팔아봤는데 나라고 별 수 없었다. 창피해서 “생선 사시오, 생선 사시오” 하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겨우 세 마리, 300원어치를 팔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걷어치웠다. 남은 생선은 시댁과 큰집, 주인집 등에 나눠줘 버리고 말았다.

“다른 연구를 해 봅시다.” “무슨 연구를 또 한당가.” “아, 그럼 마냥 이러고 있을라요?” 다시 우리는 광양에 기차 타고 가서 김을 한 톳 사다 팔아봤다. 역시 숙맥 둘이서 얼굴만 붉히다가 고작 1000원 남기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 뒤로 감도 팔아봤고 번데기 장사도 해 봤지만 걷어치우는 시기만 빨라질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빚쟁이는 계속 찾아오고,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날이 계속됐다. 그런 와중에 7월 한창 더울 때 큰딸 은영이가 태어났다. 병원은 고사하고 산파 부를 돈도 없어 애 낳은 경험이 있는 동네 새댁을 불러다 놓고 아이를 낳았다.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가신 뒤, 애 낳고 딱 사흘 만에 나는 일어나서 밥 하고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 남편은 빚쟁이들 때문에 아기 얼굴 보러 오기도 어려웠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를 인생의 가장 큰 고비로 몰아가고 계셨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