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원폭… 혹한… 구타… 곳곳서 수많은 조선인 스러져가

입력 2010-05-11 18:16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⑥ 그 밖의 기업… 끝없는 악몽의 순간들


●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낳은 도요공업

도요(東洋)공업은 일본 굴지 자동차 회사인 마쓰다(Mazda)의 전신이다. 1920년 도요코르크공업으로 시작해 1927년 도요공업으로 개칭했다. 종전(終戰) 이후 1951년부터 사륜차 업계에 진출했으며 1984년 마쓰다로 사명을 바꿨다. 한국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브리사’ ‘봉고’ 등이 마쓰다가 개발한 차종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는 총기 제작회사로서 다수의 조선인을 강제노동에 종사시켰다. 도요공업은 본사가 히로시마(廣島)현 아키(安藝)군에 있어 이곳에 끌려왔던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6일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증언은 당시 참상을 생생히 전한다.

“일어나서 창문 바깥을 내다보니까 하늘에서 낙하산이 하나 내려와. 그러고 인제 비행기 소리가 부릉부릉 나면서 금방 그게 터지는데 ‘펑∼’ 하고 아주 무겁게 나는 소리가 나면서 하늘이 꺼먼 불바다가 되어버리더라고. 워낙 큰소리가 나면서 내 몸뎅이가 한 3m 저만큼 나가떨어진 거야. 아찔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여기서 뭐가 줄줄 흐르는 거 같애. 창문이 다 날아가고 이 가슴팍이로, 얼굴로 유리 잔채기가 많이 박혀가지고….”(이남순·83·경남 사천 신벽동)

“공장 안에도 기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막 옷이 너덜너덜 해가 불에 데어가지고…밤을 새워도 남동생이 오지 않는 거예요. 찾으러 시내에 나갔는데, 개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척척척척 막 시체가 쌓여져 있고 인제 바닷물이 들어오면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는 거예요. 그런 참혹한 광경을 보곤 했는데 군인들이 나와서 전부 시체를 정리하고 있었거든요. 인제 화장할라고 쌓아놓는기라. 들여다보니까 동생이 창자가 터져가지고 비참하게 그래가 있어….”(하위년·82·부산 당리동)

도요공업의 조선인 강제동원은 익명의 일본인 전 노무담당자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징용자 명부를 1985년 일본 TBS 방송국에 넘겨 만천하에 공개토록 함으로써 처음 드러났다. 1945년 3월 12일자로 작성된 ‘반도응징사 신상조사표(半島應徵士 身上調査票)’라는 제목의 이 명부에는 신규 징용자 78명분의 이름, 가족 사항, 직업, 경력, 종교, 주량, 흡연량, 특기, 취미, 성격, 태도, 언어능력 등 상세한 신상이 기록돼 있다. 도요공업 전직 노무담당자는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죽기 직전 명부를 공개하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언제였던가. 밤길을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돌아오는데 강가에 무덤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찬찬히 살펴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피카’(일본어로 ‘번쩍’이라는 뜻으로 원폭의 별칭)에 의해 사망한 조선인의 것이었다. 당시 조선인 400여명이 건물 소개(疏開) 작업에 동원됐다 절반 정도가 사망했는데, 순간 그들의 얼굴이 마치 ‘피카’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 이 나이가 되도록 알지 못했다. ‘피카’에 당했다, 당했다 하는 녀석들이 나를 포함해 얼마나 많이 조선인들을 괴롭혔던가. 나는 이 명부를 젊은이들에게 남긴다.”

● 오지제지 사업 확장으로 시작된 죽음의 댐 건설

1940년대 홋카이도(北海道) 우류(雨龍)군 호로카나이(幌加內)정에 건설된 슈마리나이(朱鞠內)댐은 당시 ‘동양 제일의 댐’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댐의 최대 출력이 5만1000㎾에 달했다. 댐과 함께 만들어진 슈마리나이 호수는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인조 호수로 유명하다. 슈마리나이댐의 정식 명칭은 우류 제1댐이다.

댐 건설은 오지(王子)제지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시작됐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최대 제지업체인 오지제지는 1928년 대량의 원목과 전력을 동시에 손에 넣기 위해 우류천에 ‘우류전력’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하고 1939년부터 댐 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국가 주도 전력통제 정책으로 우류전력은 일본발송전기 주식회사에 흡수됐고, 도비시마구미(飛島組·중견 건설사인 현 도비시마건설의 전신)가 원청(原請) 업체가 돼 공사를 이어갔다.

댐은 1943년 8월 완성됐다. 그 과정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 3000여명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1999년 일본 민간단체에서 작성한 ‘홋카이도의 조선인 노동자-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조사 보고서’ 등에는 이런 증언들이 기록돼 있다.

“감기가 악화돼 고열을 앓고 있는 노무자도 일터로 끌려갔다. 간부에게 몇 번이고 몽둥이로 맞아 숙소로 업혀온 뒤 이내 죽은 노무자도 있었는데 의사가 와서 진단서에 사인을 급성폐렴이라고 썼다.” “밤에도 전깃불을 켜 놓고 일했으며, 새벽 4시에 일어나 이틀을 꼬박 일할 때도 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한 전력 수요에 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했고, 그 공사의 강도 때문에 희생자가 많았다.”

댐은 깊은 산속에 건설됐다. 이곳은 겨울철이면 영하 40도를 기록하는, 일본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었다. 구타와 노예노동, 극한의 추위로 얼룩진 참혹한 작업 환경 속에서 많은 조선인이 죽어 나갔다. 사망자 명부에 기재돼 있는 조선인만 해도 68명이나 된다. 댐 인근에는 현재 무연고 합동묘가 세워져 있다.

● 대규모 파업 부른 니혼강관의 조선인 멸시

옛 니혼강관(日本鋼管·2003년 가와사키제철과 합병해 ‘JFE스틸’이 됨)이 세계적 철강업체로 성장한 배경에도 조선인 강제동원이 있었다. 니혼강관은 1912년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에 설립됐다. 1930년대에는 제철 관련 여러 회사를 인수해 몸집을 키웠다. 1940년 조선(造船)회사를, 1944년 요업회사를 사들여 사업을 다각화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니혼강관 가와사키 공장에는 조선인이 3000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2008년 작고한 고(故) 조문기 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회고록에서 1944년 5월 ‘니혼강관 파업사건’을 언급했다.

“출근하던 사람과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사람들이 식당으로 들어가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운동장처럼 넓은 식당 안이 (조선인으로) 꽉 찼다. 공부를 시켜준다고 속여 군수공장 노동력으로 동원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가 폭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인을 뭉치게 한 건 한 권의 책자였다. 니혼강관 측이 펴낸 ‘훈련공 교양서’에는 조선인을 멸시하는 말이 가득 차 있었다. ‘농땡이를 잘 부린다. 밥만 많이 먹는다. 쌈질을 잘한다. 여자를 잘 후린다.’ 조선인 3000명은 식당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 “훈련공 대우를 개선하라.” 태평양전쟁 때 일본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유일한 파업이었다. 농성은 사흘째 되는 날 강제 진압됐다.

조선인 청년 수십명이 연행됐다가 반죽음이 돼 기숙사로 돌아왔다. 훗날 ‘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한 고 김경석(2006년 별세)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17세 때인 1943년 경남 창녕에서 가와사키 제철소로 강제동원된 김씨는 연행 당시 목검으로 심하게 얻어맞아 평생 오른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살았다.

그는 1991년 니혼강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 1999년 도쿄고등재판소에서 410만엔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전후(戰後) 재판에서 노무자가 위로금을 타낸 건 김씨가 처음이었다. 그는 또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不二越) 공장으로 끌려갔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들의 소송을 도와 최고재판소에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2001년 일본의 대표적 인권상인 ‘다다요오코 인권상’을 탔다.

특별기획팀=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