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저곳이 해저탄광 수몰돼 조선인 135명 떼죽음당한 곳”

입력 2010-05-11 14:46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⑥ 그 밖의 기업… 끝없는 악몽의 순간들


일제 강점기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일본 기업은 과연 몇 곳이나 될까.

본보가 이번 전범기업 시리즈를 통해 지금까지 추적한 곳은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 3대 재벌그룹을 비롯해 후지코시, 일본제철, 도와홀딩스, 아소, 북해도탄광기선 등 일제 당시 수많은 계열사와 작업장을 거느렸던 대기업이다. 기업 규모나 강제동원 노무자 수, 한국 정부에 접수된 피해자 수 등을 감안할 때 이들을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라고 지목하는 데 무리가 없다.

이 외에도 조선인들을 일본 본토로 끌고 가 강제노역에 투입했던 기업은 부지기수다. 국내에는 아직 그 전모를 파악한 연구 결과물이 없지만, 일본의 한 집념 어린 연구자가 축적한 자료가 있어 전범기업의 전체 규모를 어림잡을 수 있다.

근대사학자이자 고교 교사인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53)씨가 2007년 3월 작성한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 일람’에 따르면 조선인이 동원됐던 각 기업 작업장은 일본 전역에 걸쳐 총 2679곳이다. 여기에는 기업 및 작업장 이름, 업종, 주소, 근거 문헌 등이 명시돼 있다(자세한 명단 내역은 일본 민간단체 ‘강제동원 진상구명 네트워크’ 홈페이지 www.ksyc.jp/sinsou-net/takeitu-itiran.pdf 참조).

권역별로도 분류돼 있는데 가령 규슈 지역은 654곳(후쿠오카현 166, 사가현 44, 나가사키현 124, 오이타현 43, 구마모토현 45, 미야자키현 36, 가고시마현 64, 오키나와현 132)이고 홋카이도는 251곳이다. 다케우치씨는 일본 후생성과 각 기업, 지방자치단체, 특별고등경찰 등이 갖고 있던 노무자 명부 등을 20년 이상 조사해 일본에서도 처음으로 전국을 망라한 강제동원 자료집을 완성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해당 기업 다수가 지금은 아예 사라졌거나, 강제동원 당시 기업과 현 기업 사이의 법인 승계 여부가 불투명해 책임을 따져 묻기가 몹시 어려운 게 사실이다.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피해 신고가 100건 이상 접수된 기업만 해도 메이지광업(551건), 후루카와광업(542건), 히타치(415건), 가와사키(356건), 니혼광업(345건), 가와나미(296건), 가이지마(282건), 니혼통운(176건), 다이도제강(141건) 등이 있으나 마찬가지 이유로 현 시점에서 강제동원 책임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대기업 외에 중견기업 중에선 조세이 탄광, 도요공업, 니혼강관, 오지제지 등의 조선인 수탈이 그 정도가 특히 극악한 사례들로 꼽힌다. 전범기업 추적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 대참사 책임자 처벌은커녕 은폐 일관한 조세이 탄광

일본 도코나미(床波) 해변에 몰아치는 북풍은 차갑고 매서웠다. 인적 없는 황량한 바닷가. 잿빛 구름이 짙게 내리 깔린 음산한 하늘 아래 원통형의 거대한 굴뚝이 수면 위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굴뚝이라는 그 생경한 조합이 어쩐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이질적인 대상들을 한 화면에 결합시킨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그러나 이 바다 밑에서 벌어진 68년 전의 비극은 더더욱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난 1월 23일,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 니시키와(西岐波)촌의 한 해안가. 135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몰살했던 조세이(長生) 해저탄광의 흔적은 바다 저편 ‘피야’(pier의 일본식 발음)라고 불리는 2개의 굴뚝형 환기구로 남아 있었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30분, 조세이 탄광 갱내에서 침수 사고가 발생해 채탄 작업에 투입된 광부 183명이 그대로 수장(水葬)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이 135명이었다. 해안가 갱구(坑口)에서 피야를 지나 남남동 방향으로 1010m쯤 떨어진 곳, 수면에서는 약 37m 아래 지점이었다.

사고 며칠 전부터 갱내에는 바닷물이 줄줄 새들어왔다. 바닥에서 걸을 때마다 첨벙첨벙 소리가 났다. 평소에도 누수가 많아 항상 모터 펌프로 물을 퍼내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현장을 벗어난 광부에게는 가차 없는 구타가 가해지곤 했기 때문에 몸을 피할 수도 없었다. 1916년생으로 당시 조세이 탄광에서 일했던 재일교포 고(故) 이종천 할아버지는 생전에 이렇게 회상했다.

“간혹 ‘천장이 무너져서 물이 터졌다’며 안쪽에서 사람들이 왕창 도망쳐 오는 거예요. 도구고 뭐고 내팽개치고서. 저도 함께 도망칠 수밖에요. 그리고서 갱 밖으로 나왔더니, 세상에 마구 때리는 거예요. ‘너 이 녀석, 무슨 말을 듣고 도망쳤느냐’고요. 물이 콸콸 넘친다고 하니까 ‘그걸 네가 봤어?’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당했어요. 도망쳐 갱 밖으로 나와도 매만 맞아버리니.”

조업을 강행하던 중 기어코 붕괴 사고가 터졌다. 갱내 버팀목이 부실한 상황에서 천장 쪽에 매장돼 있는 석탄을 캐다가 천장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순식간에 바닷물이 유입돼 좁은 갱 안을 가득 채웠다. 김경봉(88·서울 방화동) 할아버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아직도 고통스럽다. “1일 2교대라 우리는 이제 야간에 거기 갔다가 아침 9시에 올라오고, 그 사람들은 9시에 내려갔죠. 구루마를 타고 바다 속으로 무지무지하게 멀리 들어가요. 그 사람들이 내려가고 한 30분 있다가 복판이 뚫어졌어요. 갱 속으로 물이 완전히 쏟아져 가지고 우리 동네 사람도 죽고….”

사고 직후 갱구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광부 가족들의 울부짖는 절규로 가득했다. 가족들은 갱구를 지키고 선 경찰 및 탄광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갱내로 들어가겠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회사 측은 갱구를 두꺼운 널빤지로 봉쇄했다.

탄광 측이 작업을 몇 시간 전에라도 중지시키고 광부들을 피신시켰다면 이런 떼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지 두 달밖에 안 된 전시 상태라 석탄 증산에 혈안이 돼 있던 회사 측은 누수 상황을 외면했다. 그리고 사고 후에도 다시 제2갱인 신우라(新浦)갱을 개발, 조업을 계속해 나갔다.

당시 야마구치현 핵심 탄전(炭田)인 우베 탄전에는 59개 탄광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세이 탄광이 석탄 생산량 기준으로 세 번째였다. 3위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조선인 노무자 강제동원이었다. 조세이 탄광은 1939년 10월부터 양질의 값싼 노동력인 조선인을 동원하기 시작해 3년간 10여 차례 총 1258명을 한반도에서 끌고 왔다. 일명 ‘조선탄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채탄부의 대부분을 조선인 노무자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탄광 측은 악독한 처우와 몰살로 보답했다.

1914년 개광한 조세이 탄광의 경영자는 메이지 전문학교(현 규슈공업대학)의 지질학 교수 라이손 후치노스케(賴尊淵之助)였다. 수몰 사고가 발생한 1942년 당시에는 그의 아들 라이손 하야타가 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들 부자(父子)는 사고 후 원인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 등의 조처도 없이 은폐로 일관했다.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여서 현재 희생자 유족들과의 접촉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옛 탄광 부지 전체가 현재 후치노스케의 손자 명의로 돼 있다.

아직도 희생자들은 수몰 장소에 내버려져 있다. 남의 나라 바다 밑에 잠든 원혼들의 한(恨)은 그대로 유족들의 한이 돼 매년 2월 3일 이곳 해안가에서 열리는 추도식은 눈물바다가 된다.

우베(야마구치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