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8) 부모냉대 속 내뜻대로 결혼… 살길 막막

입력 2010-05-11 20:37


좋게 말하면 ‘사랑의 도피’요, 당시 고향 사람들 보기에는 ‘말 꺼내기도 추접스러운 일’이었던 나의 가출 사건은 어머니의 “남사시러서 못 살겄다. 결혼 허락해 줄텡게 들어오니라”는 읍소에 흐지부지 일단락됐다. 차라리 그 길로 도망가서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가서 살았더라면 서러울 일도, 고달플 일도 적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면 고향을, 부모를, 어머니의 손맛을, 고추장을 잃었겠지. 세상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돌아와서 곧 약혼을 했다. 약혼이라고는 해도 기념사진 한 장 찍은 것이 다였다. 그때는 5월이었고 결혼식은 12월에 올렸으니 7개월을 다시 집에서 지낸 셈이다. 그 기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말이 허락이지, 부모님은 내게 무관심으로 일관하셨다. 함께 살고 있던 올케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면구하기도 하고 조바심도 났지만 “12월로 날을 잡았으니 조신허니 기다리고 있거라”는 부모님 말씀에 더 이상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남편 될 이와 상의하다 보니 큰 문제가 있었다. 결혼해도 들어가 살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집에다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근처에 사채를 놓는 아주머니 집을 찾아가 돈 2만원을 빌렸다. 그리고 앞으로 살기로 한 남원 쪽에 월세 1800원짜리 집을 구해 열 달치 방세를 선불했다. 부엌도 없이 아궁이만 있는 방이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허리 높이 좀 안 되는 쌀통을 하나 장만했다. 친정에서 해준 혼수는 스테인리스 세숫대야가 전부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남편이 나를 위해 서 돈짜리 금반지하고 그때 유행했던 비로도 한복, 코오롱 한복 두 벌을 해줬다는 것이었지만 받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결혼식 날 아침, 머리를 올리러 미장원에 가야 하는데 집안 식구들은 각기 바빠 보였다. 어머니도 올케 언니도 따라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혼자 털레털레 버스를 타고 읍내 미장원으로 향했다. 창 밖으로 을씨년스런 겨울 풍경이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 좋자고 부모 반대 다 물리치고 허는 결혼인디 웬 청승인가” 하면서 얼른 눈물을 닦았지만 봇물처럼 커지는 슬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미장원에서 친척 아주머니를 만나 “아니, 왜 새신부가 혼자 온 거여?”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엉엉 울어버렸다.

결혼식도 약혼 때 못지않게 사진만 찍는 행사에 불과했다. 가족사진을 찍은 뒤에는 다들 부리나케 식당으로 가버렸다. 그때 막내 동생이 슬그머니 와서 돈 2만원을 건넸다. “큰형이 주라 하대. 신혼여행 가라고.” 그제야 하루 종일 시큰해 있던 코끝이 좀 가라앉았다.

그러나 신혼여행 갈 여유는 없었다. ‘이 돈 2만원으로 방 얻느라고 진 빚 갚고, 홀가분하게 출발하자’고 생각하며 남편과 남원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혼 방에 들어서니 본격적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언제가 돼야 나를 기억해 내나 보자’고 벼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뒤로 몇 년이나 더 징그럽게 고생을 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떠올렸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