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35~38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 사역했던 지역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어떤 지역입니까? 화려한 수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소외되고 멸시받고 천대받은 지역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있느냐?”라고 소망 없이 부정하던 절망의 땅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로마 황제는 식민지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각 나라에 분봉왕을 세웠습니다.
당시 갈릴리 땅을 다스리는 왕은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헤롯왕은 힘없는 갈릴리 백성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자신의 왕권을 보장받기 위해 가난한 백성을 착취해 수많은 세금과 재물을 바쳤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본부인과 아들을 살해하며 동생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부인으로 삼은 포악하고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갈릴리 백성들은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빚을 지며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종이 되고 그 충격으로 정신병자들도 속출하게 됐습니다. 결국 산으로 올라가서 도적떼와 합세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소망이 끊어져버린 버림받은 땅 갈릴리에서 사역하셨습니다.
본문 36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백성들을 바라보는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말씀하는데, 개정역에는 불쌍히 여기다, 연민이나 동정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기쁨이나 슬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원본에는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내 창자가 아프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갈릴리 백성들을 보실 때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연약하고 힘이 없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속에서 지음받은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외모를 보고 차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를 무시하는 악한 죄입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한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마 9:13). 예수님은 당시에 죄인의 대명사였던 매국노 세리들과 죄인들, 윤락 여성과 한센병 환자들,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먹고 마시며 이들의 친구가 돼주셨습니다.
가정의 달 5월, 외진 곳에는 가정이 해체돼 눈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들의 고독과 슬픔과 괴로움을 알아주지 못해도 우리 주님은 변함없이 이들을 민망히 여기실 것입니다.
김양옥 목사 (서울 등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