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약국(56)
입력 2010-05-11 09:47
내가 목사로 사는 法
어머니 생신날 아침에 7남매 중 5남매가 모여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불쑥 넷째 남동생이 내게 이런다. 그는 우리 교회의 집사이기도 하다.
“형님. 저도 이제 마흔이 넘었고, 어머니 앞이기도 하니 큰 형님께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해도 되냐’고 묻는 게 아니라 ‘하겠다’고 들이밀었다. 나이 마흔은 무서움이 없어지는 나인가?
“해 보셔.” “형님. 형님이 목사로서 뜰라면(명성을 얻으려면) 이럴까 저럴까 하지 말고 어느 한 쪽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 겨?” “제가 가만히 판단해 보니 형님은 세상에 이름을 떨칠 소질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하질 못하고 계세요.” “자세히,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슈.” “형님은 설교를 완전히 자유주의로 하시든지 아니면 복음주의 또는 경건주의로 하시든지 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 형님의 설교는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합니다. 그것만 정하고 하면 뜹니다. 떠요!”
애초에 공들여 듣겠다는 심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심드렁하게 건너 받은 충고이므로 그다지 귀에 담아둘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데 하루 종일 그 놈의 ‘뜬다’는 말이 앵앵거리며 귓전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확~하고 다가온 장면 하나가 있는데 그게 마태복음 15장 29~31절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벙어리와 소경과 절름발이를 고쳐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고, 그보다 더 아프고 나쁜 병이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있지 않은가?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그런 사람들을 고쳐주는 가운데, 당신의 몸과 마음을 오직 하늘 아버지 뜻에 복종 시키고, 그렇게 영생의 도를 몸소 걸으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병자들을 고쳐줌으로써 예수님이 참으로 이룬 것은, 기적 같은 치유 행위가 아니라, 그런 걸 해서 뜨고자 했던 게 아니라, 세상에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내가 목사로서 사는 법은 ‘금’[禁, 線]을 지키는 것이다. 금을 넘지 않고 살아가는 것, 몸무게든지, 욕망이든지, 목사로서의 위치든지, 사명이든지…. 그게 내가 세우고 살아가는 뜻이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