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용평가사가 유럽위기 부채질 ‘신용위기’ 왜?… 사후약방문·상업적·과점 ‘3중 요인’

입력 2010-05-10 18:33


“신용등급은 미래지향적인 의견입니다.”(폴 코크린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부사장)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나 최근 그리스를 보면 과거지향적(뒷북 전망)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기자)

“신용평가사에 마법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누구도 등급 하향을 반기진 않습니다. 우리의 전망은 현실을 반영할 뿐입니다.”(코크린 부사장)

지난달 30일 오전 8시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3층. 코크린 부사장과 기자단과의 가벼운 설전이 벌어졌다. 이날 자리는 ‘S&P 부도율 연구 및 신용평가시스템 발전 이니셔티브’라는 주제로 S&P가 주최한 조찬간담회였다. S&P는 미국 부동산 관련 일부 채권을 제외한 전반적인 신용등급 전망에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30여분 이상을 할애했다. 금융위기를 통해 실추된 자사 신용평가 등급의 신뢰성을 항변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그리스발 재정위기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이 증폭된 배경으로 국제신용평가사의 뒷북 전망이 거론되고 있다. 사후적인 등급 하향 조정이 시장의 비관을 키우고 있다는 것. 13년 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도 신용평가사의 초고속 등급 하향에 곤욕을 치렀다. 되풀이되는 뒷북 전망의 원인에는 신용평가업계의 구조적인 결함이 깔려 있었다.

◇신용평가사 생리 어떻기에=신용평가사는 “현재와 과거의 정보를 평가해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미래 사건의 잠재적인 영향력을 분석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전적 전망보다 사후 평가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신용평가사의 전망이 사후적인 원인에는 시장의 생리가 작용한다”며 “평가를 받는 기업과 정부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구조가 이에 한몫했다”고 지적했다.

현재 무디스, S&P, 피치 등 3대 신용평가사 모두 신용평가를 요청한 채권 발행회사나 정부, 신용등급 정보이용자로부터 보수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발행사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S&P 측은 “발행사들이 공동으로 펀드를 만들어 보수를 내는 구조도 제안됐지만 어느 모델이든 이해상충은 있기 마련”이라며 “이러한 이해상충을 막기 위해 신용등급 서비스 계약을 협상하는 부서와 신용분석 및 등급 의견을 내는 애널리스트 사이에 업무 방화벽을 세워두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신용평가사의 투자 등급을 바탕으로 투자하는 기관투자가나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보수를 올리는 기업의 생리로 신용평가사의 객관성은 담보되기 힘들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두터운 진입장벽도 문제=신용평가 업무가 S&P, 무디스, 피치 등 3개사로만 신용평가 수요가 집중되는 과점시장체제도 문제다. 신용평가사의 기원 자체가 서방 일변도여서 아시아권에 대한 분석 비중이 낮고, 평가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 때문이다. 아시아 외환위기 직후 일본은 신용평가사의 아시아 홀대를 개선하기 위해 R&I 등 자체 신용평가사를 세웠지만 기존 수요를 흡수하지 못하고 주변부에만 맴돌고 있다.

국내 경제 연구기관 관계자는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용평가사와 기관투자가 간 사전 교감이 있다는 음모론도 제기된다”며 “실제로 지난달 무디스가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올리기 전 외국인의 대규모 순매수가 있었고, 이후 매도로 돌아서는 등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파는 패턴을 보였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 유독 혹독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최근 재정위기의 소용돌이 중심으로 꼽히는 ‘PIIGS 국가’(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가운데 그리스를 제외한 국가 신용등급이 여전히 한국보다 높은 점도 이 같은 지적을 방증한다.

한국의 신용등급은 무디스 A1, S&P A, 피치 A+로 그리스보다 2∼5단계 높지만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스페인 가운데 한국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경우는 그리스 다음 타자로 거론되는 포르투갈에 대한 S&P의 등급이 유일하다.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